머리 기사
이영애, 아들과 민낯 셀카→남편 정호영♥과 영화관 데이트 일상
[스포츠조선 조윤선 기자] 배우 이영애가 아들과의 투샷에 이어 남편과 데이트 중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이영애는 14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신랑과 '나를 찾아줘' 보러 왔어요. 끝까지 응원 부탁드려요"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 이영애는 남편에게 살짝 기대어있는 모습. 카메라를 응시하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 그는 어떤 각도에서도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이영애는 최근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를 통해 14년 만에 스크린 복귀했다.앞서 이영애는 "가족과 브런치. 민낯 부끄러워서 살짝 아들과 한컷. 따뜻...
"와인 그거 떫고 쓰던데 무슨 맛으로 먹나?"

와인에 빠지기 전에 딱 내가 하던 말이다. 호기심에 큰 맘 먹고 마트에서 사 온(혹은 선물 받은) 몇 만 원대의 와인을 기대감에 부풀어 개봉한다. 집에 와인잔이 없어서 대충 아무 데(가령 종이컵)나 부어서 소주나 맥주 마시듯 들이키는데, 이 비싼 와인에서 명백하게 떫고 쓴 맛이 난다. 뭐하러 이렇게 맛없는 술을 비싼 돈 주고 마실까? 역시 와인 마시는 놈들은 죄다 허세뿐이구나! 허탈감에 빠져 푸념한다.

당황스럽겠지만, 되레 숙성 잠재력이 뛰어난 고급 와인일수록 사서 바로 마시면 떫고 쓰다. 나 역시 동일한 경험이 있다. 때는 2015년 10월 18일 일요일 저녁, 그러니까 와인에 빠지고 한 달 남짓 지난 시점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르는 딱 그런 때였다. 좀 더 맛있고 좋은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나의 절박한 요청에 와인매장 직원은 이 와인을 추천했다.

루이 마티니 나파 밸리 로트 넘버 원 까베르네 소비뇽(Louis M. Martini, Napa Valley Lot No.1 Cabernet Sauvignon) 2012

맛의 대참사를 부른 와인
 
 
루이 마티니Louis M. Martini는 와인회사 이름, 나파 밸리Napa Valley는 포도 재배 지역, 로트 넘버 원Lot No.1은 선별된 좋은 포도를 의미하고,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포도 품종, 2012는 포도 수확 연도다.

미국 최고의 와인 산지로 유명한 캘리포니아주 나파 밸리 출신의 와인이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던 아내가 단단히 미쳤다며 내 등짝에 스매싱을 날릴 정도의 가격(할인가로 구매했음에도 십만 원이 넘음)이었다. 어쩌겠는가? 당시(그리고 지금도) 제정신이 아닌 것을.

"이 와인은 코르크를 열고 최소한 두 시간 이상 기다렸다가 드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이 와인의 제맛과 향을 느낄 수 없어요."
  
와린이(와인 초보)에게 와인매장 직원의 당부는 철의 규율이다. 한 달간의 경험을 통해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맛과 향이 변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도 했다. 스크류를 코르크에 낑낑대며 밀어 넣고 마개를 뽑은 후, 그 상태로 두 시간 정도 두었다가 첫 잔을 따라 마셨다.

"잉??"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떫고 쓴 것 아닌가. 분명 직원의 지침대로 두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 무슨 대참사인가? 이게 대체 얼마짜리 와인인데! 안주로 준비한 치즈를 씹으며 연거푸 와인을 따라 마셨지만 떫고 쓴 맛은 가실 줄 몰랐다. 아내에게 등짝 맞아가며 구입한 와인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었지만, 와인은 끝까지 꽃봉오리를 닫고 제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루이 마티니 나파 밸리 로트 넘버 원 까베르네 소비뇽 2012는 연도 표시에서 알 수 있듯 2012년산 포도로 만들었다. 루이 마티니 와인회사 홈페이지의 정보를 찾아보니 이 회사 대표 상품인 로트 넘버 원 와인의 경우 대략 20개월 정도 오크통에서 숙성한단다.

내가 2015년에 구입한 시점에서 보면 오크통 숙성기간을 마치고 이제 막 병에 들어간 '신상'이다. 일반적으로 고급 와인은 오크통 숙성기간 외에 병입 후 추가로 수년의 숙성기간이 지나야 기대한 맛과 향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막 담근 겉절이 김치와 익은 김치의 맛이 얼마나 다른지 떠올리면 된다.

와인에서 떫고 쓴 맛의 원인이 되는 성분은 타닌tannin인데 양조 과정에서 포도씨와 껍질, 오크통 등에서 우러난다고 한다. 특히 카베르네 소비뇽은 여타 포도 품종보다 타닌이 강하다.

와인은 병 속에서 장기간 숙성과정을 거치며 타닌 성분이 부드러워지고 맛과 향이 더욱 근사해진다. 전문적인 글에서는 이 숙성 과정을 화학적으로 설명하는데, 그 내용을 이해한다고 와인 맛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사실은 읽어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더라).

와인 평점 사이트 셀러트래커cellartracker에는 루이 마티니 나파 밸리 로트 넘버 원 까베르네 소비뇽 2012의 시음적기가 2016~2026년으로 나온다. 물론 예측치일 뿐이지만 어쨌든 전문성을 갖춘 와인평론가의 예상으로는 그렇다.

이 정보를 토대로 판단하면 숙성된 맛과 향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20년 이후가 적절한 시기다. 그런데 2015년에 마셨으니 타닌 성분이 녹아들지 않아 여전히 떫고 쓸 수밖에. 와인매장 직원도 그런 상황을 우려해서 지금 마시려면 코르크를 열고 최소 두 시간 이상 기다리라고 조언한 것이다. 

물론 뚜껑 열고 두 시간 기다린다고 해서 수년간 숙성한 맛과 향이 나오지는 않는다. 수년에 걸쳐 병 속에서 진행되는 오묘한 숙성 과정과 몇 시간 만에 급속하게 진행되는 인위적 산화 과정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점진적 숙성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맛과 향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개 제거 후 와인이 공기와 접촉하며 산화되는 과정에서 타닌이 누그러들고 와인이 마시기 좋게 부드러워지는 것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내 경우는 두 시간 뒤에도 떫고 쓴 맛이 여전했다. 이유는 뭘까? 공기와의 접촉면이 너무 협소했기 때문이다. 코르크 마개 제거 후 와인이 공기와 접하는 위치는 일반적으로 좁은 병목 부분이다. 이 정도의 접촉면으로는 유의미한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다. 같은 두 시간이더라도 공기와의 접촉면이 넓으면 와인의 변화가 더 빠르다.

지금의 나라면 와인을 일정량 잔에 따라내어 와인이 공기와 만나는 지점을 병목 아래 어깨 부분까지 낮출 것이다. 그러면 와인과 공기의 접촉면이 더 넓어지며 병 속 와인의 변화가 빨라진다. 잔에 따른 와인 역시 공기와의 접촉면이 넓어지기 때문에 맛과 향의 변화가 빠르다. 이런 상태로 두 시간 정도 지나면 거친 타닌이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면서 맛과 향이 개선됨을 실제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와인이 공기와 접촉해 변화는 과정을 브리딩Breathing이라고 한다. 와인이 공기와 만나 숨을 쉰다는 의미다. 공기와 접촉시킨다는 의미로 에어레이션Aeration이라 부르기도 한다. 브리딩을 하면 와인의 맛과 향이 좋아진다고 해서 너무 오랜 시간 방치하면 공기와 지나치게 반응해 오히려 맛과 향이 꺾이고 심지어 식초가 되기도 한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적당한 브리딩 시간은?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브리딩은 어느 정도 진행하는 게 적절할까? 와인마다 포도 품종, 토양과 기후, 양조자가 다르니 특정한 시간을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번거롭더라도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직접 맛을 보며 확인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저가 와인의 경우도 따서 바로 마시는 것보다는 10분 내지 20분 정도 기다렸다 마시면 맛과 향이 더 좋다.

다만 저가 와인은 일반적으로 브리딩이 두 시간을 넘어가면 오히려 맛이 쉽게 꺾이기도 한다. 요컨대 와인을 열어 일정량을 와인 잔에 따른 후 브리딩을 진행하면서 15~20분 단위로 맛과 향의 변화를 점검한다. 그러다가 와인이 마시기 좋게 부드러워졌다 싶으면 그때부터 안주를 곁들여 '천천히' 마시면 된다. '천천히'를 강조한 이유는 마시는 과정에서도 와인의 맛과 향이 다채롭게 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좋은 와인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간혹 디캔터라는 기구를 사용해 브리딩을 한다. 디캔터는 장기간 숙성된 와인에 생성되는 침전물을 걸러내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기구다. 입구는 좁고 내부는 넓은 구조로 되어 있는데, 침전물을 걸러내기 위해 와인을 병에서 디캔터로 조심스럽게 옮기는 과정에서 와인이 공기와 풍성하게 접촉한다. 게다가 디캔터 내부는 와인 병보다 공기와 닿는 면적이 훨씬 넓어서 산화 과정이 촉진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침전물을 거르는 용도 외에 단시간에 빠르게 브리딩을 진행해야 하거나 타닌이 매우 강한 미숙성 와인을 브리딩 할 때도 디캔터를 사용한다. 다만 디캔터를 사용해 브리딩을 하면 병에서 브리딩을 하는 것에 비해 와인의 맛과 향이 다소 차이가 난다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 내 경우에는 와인을 빠르게 브리딩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디캔터를 이용하는 편이다.

노파심에서 첨언하자면, 병 속에서 오래 묵혔다고 무조건 좋은 와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저가 와인은 숙성 잠재력이 떨어져서 보관상태에 따라서는 단기간에 쉽게 변질된다. 고급 와인의 경우에도 너무 오랜 기간(예컨대 30년)이 지나면 와인이 갈색으로 변하고 본연의 풍미를 잃는다. 그러니 맛있게 마시겠다고 1만 원대의 와인을 집에서 몇 년씩 묵히면 오히려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다. 맛없어지기 전에 후딱 마시자.

어린 시절 눈두덩에 자국이 나도록 만화경을 눌러 대고선 이리저리 돌려 보며 작은 통 안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화려한 무늬들에 흠뻑 빠져들던 기억이 생생하다. 와인이 공기와 만나 입안에서 펼쳐내는 맛과 향의 다채로운 변화는 가히 미각의 만화경이라 할 만하다.

이 글을 쓰며 문득 2017년 1월 1일에 마셨던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 누아 와인이 떠오른다. 그 와인이 공기와 만나 활짝 열렸을 때 내 미각과 후각을 자극했던 느낌은, 나에게 외딴 섬에서 고요한 밤바다를 바라보는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다. 이런 얘기를 털어놓으면 분명 누군가는 술 하나에 유난 떤다고 혀를 찰 것이다. 어쩌겠나? 그 와인이 나에게 유난스럽게 다가온 것을.
"내일 배추 씻을 사람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야 된다." 
"그렇게 빨리?"
"그럼, 그래야 배추 씻고 물 빼서 속 넣지." 
 
우리집은 5형제가 다 함께 모여 김장을 하는데, 3년 전부터는 시골집에서 김장을 한다. 엄마가 아파트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불편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칼, 믹서기 등 주방용품과 갖은 양념 그리고 커피, 쌍화차, 점심거리까지도 몽땅 바리바리 싸들고 가야한다. 혹여 빼먹고 못 챙긴 것이라도 있으면 차를 타고 읍내 장터까지 나가야 한다.
 
 
시골집 마당에서 펼쳐지는 김장 모습은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다섯 집 김치니 좀 많겠는가. 배추만 120포기고, 무우, 갓, 파, 젓갈, 생강, 마늘, 고춧가루, 설탕 등등과 김치통에, 고무대야에, 광주리에 좁은 시골집 마당은 발 디딜 틈도 없다. 
 
"엄마, 설탕 이거 다 넣어?"
"응, 그거 다 넣어." 
"고춧가루 더 넣을까?" 
"그럼 맵지 않을까?"
"올해 고춧가루가 하나도 안 매워서 다 넣어도 돼. 생강이랑, 마늘도 다 넣고."
 
"이제 먹어봐. 된 거 같은데."  

엄마가 우리에게 먹어보라고 하신다. 
 
"엄마, 좀 싱거운 거 같은데?" 
"난 괜찮은데." 
 
누군 싱겁고, 누군 괜찮고, 누군 맵고… 근데도 엄마는 결국에는 모두의 입맛에 딱 맞게 간을 해 놓으신다. 눈대중으로 대충 넣는 것 같은데도 어떻게 그렇게 맛깔나게 간을 맞출 수 있는지. 그것도 배추 열 포기도 아니고 백 포기에 들어갈 양념간을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대부분 그럴테지만.  
 
 
엄마만의 요리 방식 때문에 나는 가끔 엄마와 충돌을 하기도 한다. 이런 식이다. 
 
"엄마 이 파 얼마나 길게 썰어?" 
"적당한 길이로 썰어."

"이 정도?" 
"그건 너무 길지."

"그럼 이정도?"
"그거보다 좀 길게."

"이렇게?"
"에이, 그건 또 너무 짧지."

"아, 몰라. 그럼 엄마가 썰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큰언니가 중재에 나선다. 

"한 5 cm길이로 썰어."

그렇게해서 기껏 다 썰어놓으면 엄마는 또 잔소리를 한다.

"아유, 파 너무 길게 썰었다. 대가리 큰 것은 반으로 잘라야 하는데, 하나도 안 잘랐네. 그럼 먹을 때 씹혀서 별로 안 좋은데" 
"5cm 맞잖아. 파가 왜 질겨?"
 
나는 결국은 짜증을 내고 만다. 파가 좀 길면 어떻고, 좀 짧으면 어떻다고. 다른 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엄마는 모든 지 다 '적당히'라고 하고, 나는 그 '적당히'를 이해하지 못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김장 할 때에도 내내 엄마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속은 배추 하나 버무릴 만큼만 가져다가 해라." 
"배추 큰 거는 반으로 쪼개서 해라."
"김치통에 너무 많이 담지 말아라."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잔소리를 한다. 물론 엄마의 잔소리에는 다 이유가 있다. '파가 너무 길면 먹을 때 질깃질깃 잘 씹히지 않고, 무우 양념을 한꺼번에 휘둘러 놓으면 고춧물이 다 빠져 나중 것은 하얘지고, 김치를 너무 많이 담으면 김치국물이 넘치니깐.' 그래도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있으면 머리까지 아프다. 
 
엄마는 나한테 잔소리를 쏟아 붓고는 이번엔 다 담아 놓은 김치통 쪽으로 가신다. 
 
"이건 왜 이렇게 헐렁하게 담았어? 배추 두 개는 더 들어갈 것 같은데. ㅇㅇ아, 배추 작은 걸로 2개만 가져와 봐라."
"김치통에 묻은 고춧가루 닦고 뚜껑 덮어라."
"여기 우거지가 없네." 
 
배추가 떨어진 데에는 배달까지 하면서 엄마는 전장을 누비는 장수처럼 마당을 종횡무진 누비며 김장을 총지휘했다. 
  
 
엄마는 늘 허리벨트를 차고 있는데, 허리띠를 차고 있으면 허리가 힘을 받아서 좀 덜 힘들다고 삼복더위에도 풀어 놓지 않는다. 
 
"엄마, 그거 답답하지 않아?" 하고 물으면 "아니, 하나도 안 답답해"라고 하시며 '요새 충전이 되는 제품이 나와서 겨울에 차면 따뜻하고 좋다'고 나도 하나 사라고 하신다. 
 
엄마는 그렇게 허리벨트를 차고 '엄마는 이제 들어가 좀 쉬세요. 우리가 하게 두세요'라는 말도 못들은 척하고 한 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김장이 끝났을 때, 엄마는'찜질 허리띠'에도 불구하고 허리도 제대로 못폈다. 
 
"아이구 힘들어."
 
엄마 입에서 힘들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니깐 아까부터 쉬라고 했잖아…."
"하여간 엄마는 고집하고는…"
"엄만 정말 못말려."
 
우리는 엄마를 위한답시고 한 마디씩 했다. 엄마는 대꾸할 힘도 없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 얼굴은 이상하게 편해 보였다. 마치 '이제 내 할일 다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엄마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큰 언니가 "내년부터는 각자 김장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엄마 너무 힘드셔서 안되겠어"라며 깜짝 발언을 했다.
 
"이제 엄마가 해 준 김치 못 먹는 거야?"
"그럼 우린 이제 김치 사다 먹어야겠네." 
"맞아, 엄마 너무 힘들어."
"그럼 난 언니네랑 같이 해야지."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내년에는 진짜 우리가 다 하면 되잖아. 엄만 그냥 와서 보고만 계시면 되지." 
"그게 되니? 내가 보니깐 제일 일을 많이 하는 게 엄마더라. 우리는 앉아서 배추 양념하는 동안 엄마는 혼자 무거운 김치통 옮기고, 배추 날라다 주고… 계속 허리 숙였다 폈다 하면서 한 시도 안 쉬시더라. 쉬란다고 쉬실 엄마도 아니고."
 
한동안 우리끼리 이러쿵저러쿵 하다 엄마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엄마, 진짜 내년에 김장 못할 것 같아?" 
 "모르겠다. 내년에 엄마가 어떻게 될지…."
 "..."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아무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나 죽을 때까지는 제사도 지내고, 김장도 담글 거'라던 엄마는 온데간데 없었다. 엄마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드셨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자식들은 김치 못먹을 걱정만 해댔으니...자식들이란.
 
내년 일은 내년에 결정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열흘 후쯤 엄마한테 '만두 하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하여간 엄마는 힘들다면서 일도 잘 벌려.' 
 
"엄마 몸은 이제 괜찮아?"
"이번엔 진짜 힘들더라. 그래도 이젠 많이 풀렸어." 
 
그러면서 또 잔소리를 늘어 놓기 시작했다. 
 
"당면 자를 때 칼에 기름을 묻혀라. 그럼 안 붙는다".
"양파는 왜 그렇게 잘게 다지냐, 씹을 거 없게."
"파 그렇게 길게 자르면 피 밖으로 삐져 나온다."
"아, 엄마 쫌.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저리 가 있어. 엄만 그렇게 우리가 못 미더워?" 
"잘하는데, 그래도 틀린 건 가르쳐야지. 엄마가 없으면 가르쳐 줄 사람도 없잖냐?" 
 
하면서 거실 쪽으로 나가셨다. 
 
순간 '아차' 싶었다. 엄마는 '당신이 없어도 자식들이 잘 할 수 있도록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는 것인데….' 엄마 마음을 알면서도 순간을 못 참고 또 엄마 마음을 쓸쓸하게 했다. 소파에서 TV리모콘을 돌리고 있는 엄마가 애잔해 보였다. 그래도 평소처럼 잔소리를 하는 엄마를 보니 훨씬 마음이 놓였다. 
 
엄마는 요새들어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될지…'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을 듣는 나도 '진짜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인담샘, 이육사 선생 알지요?" 출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동료 주임은 '문화 커뮤니티시설 전시계획'을 내보이며 "육사 선생이 '청포도'를 발표한 1939년경 종암동에서 살았대요. 그래서 주민들이 기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어요. 덕분에 사업이 시작되었고 신축 공사가 곧 마무리됩니다. 같이 전시계획을 세웠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최인담은 서울 성북구청에서 김광섭, 조지훈처럼 성북동에 살았던 문인을 기리는 '근현대문학기념관' 개관사업을 맡고 있던 터였다. 개관이 되면 간송미술관, 윤이상 집터, 한용운의 심우장 등으로 이어지는 문화탐방길을 완성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이 사업도 쉽지 않은 터에 '주민 커뮤니티 공간 개설' 작업이 동시에 다가온 것이다.
 
그가 과제를 맡았을 때, 이육사에 대해 아는 바는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었고 수인번호가 '264'번이어서 필명을 이육사(李陸史)로 하였다는 점, '광야'와 '청포도'가 그의 대표시라는 정도였다.
 
'광야'의 마지막 연,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라는 문장은 고등학교 시절 맑고 선명한 이지미로 다가왔고 '초인'은 누구일까? 그런 질문을 품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도 육사는 큰 산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과제는 벅찼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육사, 라는 큰 산
 
 
그런데 막상 추진하려니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주민들 뜻에 따라 종암동에 공간을 매입했지만 한 층 면적이 겨우 20평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육사의 고향 경북 안동에 있는, 외동따님인 이옥비 여사가 관장으로 있는 이육사 문학관과 알게 모르게 비교가 되었다.
 
인담은 조사차 세 번이나 그곳을 다녀왔다. 청량산과 건지산을 좌우로 거느리고 낙동강이 흐르다가 큰 들판을 뿌려놓은 곳에 원촌마을이 있다. 그곳은 광야의 시상지(詩想地)이기도 했다. 바로 그 터에 세운 이육사문학관! 선생이 남긴 육필원고를 비롯해 1934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신원카드나 신석초에게 보낸 엽서 등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임청각이나 도산서원 등 연계할 수 있는 유적지도 많았다.

이광수, 모윤숙 같은 문인들이 변절하고 일제에 아부할 때, 1944년 차디찬 베이징감옥에서 죽는 날까지 시를 썼던 치열한 삶이나 그가 이룬 웅혼한 시세계를 감안하면 종암동 공간이 육사를 모시기는 너무 좁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주민의 바람이 컸다. 사실 구청 민원은 대부분 개발과 편의시설에 관한 거였다. 그런데 종암동 사람들은 동네가 품었던 시인을 기억하고, 그의 유해가 중국 베이징에서 돌아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힌 것도 기리자고 하니 평수는 작지만 그 뜻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시민 공모 끝에 '문화공간 이육사'라고 지었다.
 
"광야를 대표시로 택하면 '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어떻게 해석할 건가요, 인담샘?"

시나리오 작가의 질문이다. 요즘은 구청 사무실보다 개관을 앞두고 '문화공간 이육사' 1층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일단 개관기념 특별전의 제목은 '식민지에서 길을 잃다. 문학에서 길을 찾다'로 확정했다. 12월 17일 개관일까지 며칠 안 남아 오늘은 늦더라도 세부 주제와 대표시를 정해야만 한다.
 
초인을 찾아서

머릿속에서는 청포도와 절정, 광야가 맴맴 돌고 있었다. 그래서 현대미술작가까지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참이다. 고개 돌려보니 창밖 맞은 편 점포들엔 벌써 등불이 켜졌다. 종암동에 터 잡은 문화공간임을 감안하면 육사가 이곳 62번지에 거주할 때 발표한 '청포도'나 '절정'을 대표시로 택하는 것이 좋지만 이육사의 정신이 오롯이 배어있는 작품은 역시 '광야'이기에 고민이 컸다.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초인이 해방을 맞은 자아'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맞나요?"
저녁 대신 커피 한잔과 귤 한송이를 앞으로 내미는 인담에게 시나리오 작가의 질문이 계속된다. 전시 그래픽을 담당하는 미술작가도 "초인은 독립군 지도자고 최근 연구 성과는..."하며 의견을 보탰다. 
 
 
사실 인담은 '근현대문학기념관'과 '문화공간 이육사'를 맡으며 고민이 컸다. 작품에 대한 해석 문제가 난감했다. 근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도로서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배경을 보고자 하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도 중요했다. 특히 '이육사 전시'처럼 삶과 시를 통해 그의 독립운동과 문학세계를 함께 보여줘야 할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대표시 선정과 구역배치는 한 번 더 얘기를 하지요." 생각도, 얘기도 쳇바퀴고 허기도 느껴져 일단 회의를 마쳤다. 늦은 저녁 국밥이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구청에 들어가 나머지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인담은 일행과 밖으로 나섰다.
 
"어머, 간판에 불이 들어 왔네요"라는 말에 뒤돌아보니 '문화공간 이육사'라는 글자가 옥상에서 빛나고 있었다. 육사의 시처럼 밤하늘에 명징한 글씨들을 보니 인담은 정말 알 수 없는 게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 초까지만 해도 성북구청 학예사, 정확히는 '지방 시간선택제 임기제 공무원'이 되어 육사와 이렇게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날은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근현대사기념관' 업무 막바지 인수인계를 하던 3월 중순이었다. 퇴근길, 가로수 곳곳에 남아있는 봄볕과 개나리 새순 향을 느끼며 걷고 있었다. 그때 "'우우우웅..."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화면을 살펴보니 2241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혹시나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수신버튼을 밀었다.
 
"네, 정말이요!?" 인담은 풀썩 주저앉았다, 아니 철퍼덕 앉았다. 휴대폰 화면으로 어느새 눈물방울이 번지고 있었다. "준비할 서류가 있어요"라는 말에 서러움인지 기쁨인지 모르는 눈물을 닦으며 몸을 추스렸다. 마음은 조금씩 진정되는데 머리가 바빠졌다. 누구에게 이 소식을 먼저 전해야 할까? 남자친구... 엄마...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냉큼 만나기로 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딸 잘했다. 정말 잘 됐다"며 "출근 준비 잘하고 항상 겸손하고 몸 조심하고..."라는 달콤한 당부가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18:1의 경쟁률! 성북구청에서 새로 추진하는 근현대문학기념관 개관을 준비하는 학예사 채용에 많은 재원들이 몰려들었다. 의미도 있고 좋은 경력도 쌓을 수 있기에 그런 경쟁률이 무리는 아니었다.
 
학예사의 소명

고향이 전주인 최인담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부터 금산사, 미륵사지 같은 문화재 탐방을 하며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역사학자를 꿈꿨다. 집안 형편은 어렵고 남동생 둘을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 2007년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대학원 논문으로 다룬 주제는 '반민특위'였다. 논문 쓸 때 거의 10년을 우왕좌왕했지만 어렵사리 학위를 받았고 학예사 자격증도 얻었다.
 
졸업하고 선배와 인연으로 민족문제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했고 현재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운영하는,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만든 단체다. 연구소 선배들은 인담을 젊은 역사학도로 일으켜주었고 흔들릴 때마다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그렇게 인연이 닿았던 때, 마침 연구소가 강북구청으로부터 '근현대사기념관' 개관전과 운영을 위탁받았고 인담은 그곳에 학예사로 파견되었다.
 
'학예사'란 말은 참 빛깔이 좋다. 학문에 예술, 그리고 선비를 더했으니 국화향이 날 법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예사들의 처지는 말뜻과 다르게 고달프다. 몇몇 국공립박물관을 제외하곤 대부분 비정규직이고 갤러리나 사설전시관 같은 경우는 단기 계약직에 최저임금 언저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인담의 학예사 생활도 다르진 않았다. 학예사 생활 3년, 많은 경험을 했지만 강북구청에서 위탁사업비로 책정된 예산이 빠듯해 생계가 어려웠다. 대책도 없이 "변화를 위해" 2019년 2월 28일로 사직을 했다. 그때 성북구청 학예사채용 공고를 접했고 면접에서 우물대기만 했는데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경험을 높이 평가받아 이날 합격통지를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간 즐겁게 일을 했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는 개관특별전 운영과 기획전시 업무가 전부였는데 이곳 성북구청에서는 근현대문학기념관도 그렇고 문화공간 이육사도 타당성 평가, 예산 확보, 건물 설계 등 행정 전반을 배울 수 있었다.
 
"내일 만나서 결정하자"는 인사를 뒤로 하고 인담은 구청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거리에는 연말 분위기가 조금씩 일렁인다. 눈에 안 띄면 아쉬울까 봐 군고구마·호떡 장수가 드문드문 보인다. 첫눈 소식까지 있으면 더 좋으련만... 인담은 버스에서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육사는 광야를 언제 썼을까? 시상(詩想)은 허허 들판 고향 원촌마을에서 얻고, 북경의 차디찬 감옥 안에서 추위에 부르튼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마분지에 꾹꾹 눌러써 완성했을까? 그래서 유해와 함께 '광야'는 돌아와 해방 후에나 발표되었던 걸까?
 
       
인담을 실은 성북구청행 버스는 저녁 어둠을 안은 탓인지 발걸음이 더뎠다. 맞은 편 차들도 어둠을 안고 꾸물댔다. 그는 더욱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목놓아 부르고 싶었던 조국해방'을 '천고의 뒤'로 미뤄야 하는 슬픔에 육사는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을까?
불꽃같은 항일의지와 웅혼한 시세계를 간직하고도 죽음 앞으로 끌려가야 할 때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눈앞에 그려졌던 걸까?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하는 아픔에 그렇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문장을 길어올린 걸까?'
   
"이번 정거장은 성북구청입니다"라는 안내방송에 인담은 흠칫 놀랐다. 요즘 육사의 삶과 시를 곱씹다가 정거장을 놓치기가 일쑤였다. 서둘러 내린 인담은 7층 문화관광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불과 6개월 남짓이었지만 벌써 정이 많이 들었다. 인담은 자리에 앉아 잔무 처리는 미뤄두고 다시 육사 시집을 꺼내 들었다. 늦은 시간이어서 사무실엔 정적뿐, 어둠 한가운데서 탁상 등을 올리고 '광야' 한 구절을 나직하게 입에 올려본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인담의 낭송이 조용한 사무실을 조심스레 가로질러 창문에 '똑'하고 부딪힌다. 인담은 한번 숨을 가다듬고 다음 구절을 읊조려본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창밖에는 겨울 어둠을 헤치고 성북동 별빛과 종암동 달빛이 가만가만 다가와 인담의 어깨를 맑게 비춰주고 다사롭게 어루만진다. 인담의 낭송은 그치지 않고 밤늦도록 이어진다.
 
<못다 한 이야기>
 
1. '문화공간 이육사'의 개관기념 특별전 '식민지에서 길을 잃다, 문학으로 길을 찾다'의 개관은 17일에 진행될 예정이고 대표시는 '절정'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식민지민중의 아픔을 잘 대변한 시라는 판단에서입니다.
 
2. 1945년 12월 17일은 해방후 '자유'에 이육사 선생의 유고시가 발표된 날입니다. 이 날을 기려 개관일을 잡았습니다.
 
3. 최인담 학예사는 수유리 근현대사기념관에서도 좋은 분들을 통해 많은 배움을 얻었지만 이곳 성북에서도 그에게 큰 도움을 준 분들이 많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끝없는 열정이 인상적인 성북선잠박물관 오민주 학예사, 성북구청의 1호 학예사이며 따뜻한 이성을 가진 김지은 학예사, 굳은 일 마다 않고 살뜰히 챙겨주시는 전서령 학예사, 그리고 소중한 경험과 자산을 아낌없이 나눠준 국립한국문학관 최혜화 학예사, 또 인담의 전문성을 존중해주는 구청 문화기획팀 동료들..."입니다.
 
4. 민족문제연구소는 최인담 학예사에게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선배와 연구원들이 독립운동하는 느낌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이나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세우는 과정은 그에게 큰 가르침으로 남아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학예사 최인담 프로필>

2016.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2016. 3. 근현대사기념관 재직
2019. 3. <선생님, 3.1운동이 뭐예요?> <선생님, 대한민국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공저
2019. 5.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재직
이번엔 전라도다. 지난 7월부터 지역에서 한번씩 시민기자 모임을 했다. 시작은 마산창원이었고, 대구경북 지역을 거쳐 지난 11일엔 올해 마지막으로 광주에 있는 시민기자들을 만났다. 따뜻한 남쪽 나라를 기대했는데 웬걸... 날은 흐리고 매서운 바람이 불던 오후 광주에 도착했다.  

[관련 기사]
퇴근 후 포항에서 2시간 달려온 모임의 정체 http://omn.kr/1k2a7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는 동질감이 주는 마법 http://omn.kr/1lgkf

출장을 오기 전, 명단을 보니 대부분 여행기사를 쓰는 시민기자였다. 이번엔 '여행 기사 이야기를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다 오래 활동하셨고, 기사도 잘 쓰는 분들이라 편집기자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시민기자들끼리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해도 좋을 것 같았다. 미리 쪽지를 보내 이번 모임에서 각자 여행 기사를 어떻게 쓰는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전주에 사는 안사을 시민기자부터 서부원, 차노휘, 문운주 그리고 목포에서 퇴근하자마자 달려오신 이돈삼 시민기자까지 그 면면이 화려했다. 지금까지 이런 비법 전수는 없었다. 베테랑 시민기자들이 여행지에서 취재하고 기사 쓰는 법, 그 내용을 지금부터 공개한다.
 
 
이돈삼 시민기자(2001년부터 활동. 시민기자 경력 18년)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한다. 대변인실에 있어서 일반인보다 취재에 용이한 것은 있지만 그게 내 활동의 전부는 아니다. 한 곳에서 오래 일한 만큼 같은 장소를 많이 다루게 된다. 똑같이 다루면 재미없다. 그래서 늘 관점을 달리해서 기사를 쓰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박물관 하나를 소개하려고 해도 다양한 관점에서 소개하려 애쓴다. 지역사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그때문이다. 뭐 하나라도 새롭게 쓰기 위해서다. 

이순신 기행을 써달라고 부탁받았을 때도 처음엔 하나도 몰랐다. 공부하면서 쓴 거라 많이 힘들었다. 지금은 완전히 내 콘텐츠가 됐다. 그 기사 때문에 방송 출연 요청도 종종 받는다. 내년이 광주 5.18 40주년이라 관련한 교육도 받고 있다. 내년에는 아마도 이 일로 바쁠 것 같다."
[관련기사 : 421년 전 가을, 이순신이 걸었던 길을 걷다 http://omn.kr/18maj]

서부원 시민기자(2002년부터 활동. 시민기자 경력 17년)
"'아이들은 나의 스승'을 연재하며, 방학 때마다 외국에서 한달살이 한 이야기를 글로 썼다. 지난 겨울방학 때 독일에 있었고, 이번 방학에는 이탈리아에 간다. 가족들과 같이 움직이는 거라 많은 도시들을 다닐 수는 없지만,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여행을 설계하면서 배워가는 게 많은 것 같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의 삶을 보여주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쓰면서 많이 치유받는 기분이다. 오늘은 특히 이돈삼 기자님과 안사을 기자님 등 여행기사를 잘 쓰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오게 됐다."
☞ 연재기사 아이들은 나의 스승 보러 가기

안사을 시민기자(2006년부터 활동. 시민기자 경력 13년)
"전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 여행 기사의 특이점이라고 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오지를 간다는 것. 그리고 필름 인화를 하기 때문에 사진 보정을 하지 않는다. 가끔 제 사진을 보고 '다 보정이네'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특별히 말하고 싶었다. 보정하려면 필름으로 사진을 찍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사진 때문인데, 기사가 취재한 시점으로부터 약 한 달쯤 늦는다는 거다.

보름 정도 여행을 가면 사진 작업만 딱 여행 기간 만큼 걸린다. 거기에 기사를 쓰는 시간까지 더하면, 한 달 정도 걸리는 것 같다. 김종술 기자님은 4대강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말함으로써 우리 강의 중요성을 알린다면, 저는 알려지지 않은 강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강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계속 지켜가야 한다고 기사를 통해 계속 말하고 싶다."
[관련기사 : 눈 시리게 푸른 제주, 무심히도 아름답다 http://omn.kr/1hjth]

문운주 시민기자(2003년부터 활동. 시민기자 경력 16년)
"독자로 왔다. ^^ 사실 딸아이가 아이를 낳고 손녀들 봐주는 이야기를 사는이야기로 썼다. 그런데 악플이 너무 많아서... 이젠 안 쓴다. 주로 여행을 다니거나 무등산에 간 이야기를 쓴다. 광주에 계속 살았으니, 옛 기억을 살려서 기사를 쓰거나 환경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뭘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번 모임을 통해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관련기사 : 겁도 없이 다가오는 뿔 소 한마리, 아이들 반응은? http://omn.kr/1krhk]

차노휘 시민기자(2018년부터 활동. 시민기자 경력 1년)
"내가 가장 최근 가입한 시민기자인 듯하다.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해부터 산티아고 순례기랑 최근 이집트 다합에서 스쿠버 다이빙한 이야기를 썼다. 계획하는 여행보다는 여행 중에 생기는 우연한 일들, 직접 몸으로 부딪히면서 만들어지는 그 과정이 재밌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뒷길을 더 좋아하는 그런 타입이다. 요즘 오르한 파묵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중동 지역을 공부하고 있는데, 꽤 재밌다. 내년에는 이와 관련한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 연재기사 :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보러 가기

사무실에서 보는 기사만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시민기자들의 생생한 취재기를 듣자니 재밌기도 했지만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여행 기사를 볼 때 간혹, 시의성이 떨어지는 내용이면 편집기자는 '여행 다녀오신 지가 언제인데 왜 이렇게 늦게 쓰셨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 해서 쓴 기사라 할지라도 여름 여행기를 겨울에 채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뉴스 매체라면 응당 시의성을 고려해야 하니까. 그것은 내가 일을 하는 데 있어 꽤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그런데 이날 알았다. 시민기자는 다를 수 있다는 걸. 나에겐 기사지만 그에겐 작품일 수 있다는 걸. 그걸 알아주면 좋겠지만, 알아주지 않더라도 괜찮은 게 시민기자의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게 시민기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물론 채택이 되지 않거나, 기대한 만큼 배치가 되지 않았을 때 서운한 마음은 당연할 거란 것도 안다). 

이날 서부원 시민기자는 일하면서 여행도 하는 이돈삼 기자님의 신분이 그저 부럽다고 했다가, 서둘러 말을 거둬들였다. 그가 하나의 기사를 쓰기까지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되면서다. 공식적인 일때문에 가는 방문이더라도 박물관 입장료를 꼭 낸다는 이돈삼 시민기자의 말을 듣고, 나는 '시민기자로서의 소명 의식'마저 느껴졌다. 
 
여행 기사뿐만 아니라, 쓰고 싶은 글에 대한 이야기와 잘 쓸 수 있는 글에 대한 아이디어 등을 서로 주고 받는 사이 3시간이 훌쩍 흘렀다. 한 시민기자분에게는 하루 전날까지도 올까 말까 망설였는데, 오길 잘했다는 감사한 인사도 받았다.

기사 채택 여부를 떠나, 배치 등급을 떠나 한 기사의 이면에는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과정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이번 모임을 통해 내가 다시 배운 한 가지다.
 
한 해를 보내고 또 새해 맞을 준비를 해야 할 때다. 이즈음 우리는 '연말연시'(年末年始)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연말이면 만남의 장이 여럿 마련된다. 이른바 '송년회'다. '보낼 송(送)'에 '해 년(年)', '묵은해를 보낸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주로 '망년회'(忘年會)란 말을 썼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이것이 송년회로 전화(轉化)돼 쓰이고 있다. 막연히 생각해 보기로는 '망' 자가 '망할 망(亡)'을 연상케 해 송년회로 바꿔 쓰지 않나 싶기도 하다.

올해도 몇 군데 송년 모임엔 꼭 참석하려 한다. 지난 6일 고등학교 동기회 송년회가 서울 한복판 공군회관에서 열렸다. 150여 명의 부부가 참석해 오랜만에 우정을 두텁게 나누고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0년 이상 지났고 친구들은 환갑을 지났지만, 건강한 모습에서 삶의 생기를 읽을 수 있었다. 
 
정기총회를 마치고 여흥의 시간엔 각자 갖고 있는 '끼'들을 맘껏 발산하는 게 마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개중에는 평소 얌전을 빼던 친구가 다른 사람처럼 돌변해 좌중을 쥐락펴락해 눈을 의심케 만들기도 했다.

손목시계가 선물이라고?
 
이런 송년 모임에 참석하고 돌아올 때면 기념선물 한두 개씩 손에 쥐어준다. 몇 년 전 갔을 때는 도자기가 선물로 주어졌고, 또 그 이태 뒤인가에는 은수저 세트를 선물로 받아왔다. 올해 송년모임엔 철 지난 손목시계가 선물 목록에 올랐다.
 
시계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왜 시계 선물이냐고 할 사람이 분명히 있을 듯하다. 전 국민이 휴대전화 하나씩 소지하고 있는 때에 손목시계는 선물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휴대전화에는 시뿐 아니라 초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주는 기능이 있지 않나.

초로의 친구들이 향수(鄕愁)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순진무구했던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손목시계 하나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향수의 작은 부분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 40여 년 전에는 살기가 괜찮은 집 자제들만이 시계를 차고 다녔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친구들이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 '특별하게' 그때의 꿈(손목시계를 갖고 싶은)을 이룬 게 된다. 선물에 이런 추측성 해설을 곁들이는 것도 유별나다. 어떻든 손목시계 선물을 생각해낸 동기회 임원들을 나는 칭찬하고 싶다.
 
고등학교 송년 모임이라고 했다. 기념선물로 준비한 손목시계가 시대 흐름에 맞지 않다고도 했다. 하지만 40년 세월을 되돌리는 향수를 일정 부분 불러일으키는 매개물로 역할을 한다고 정리했다. 

고학생과 '오리엔트 손목시계'
 
고등학교와 손목시계라는 단어는 내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인(動因)도 여기에 있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에 갈 수 없었던 나는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이유가 가장 컸다. 어린 나이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남의 밑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시간을 지키는 것이었다. 지금 시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천으로 있는 게 시계인데, 시간을 몰라 일하러 가는 데 어려움을 겪다니! 나는 중학생 나이 때부터 혼자 자취를 했다. 어떤 때는 두어 시간 전에 일터로 갈 때가 많았고, 또 한 시간쯤 지난 뒤 출근해 주인에게 혼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 주인의 배려로 구입한 게 '오리엔트 손목시계'였다. 중고라고 하지만 쓸 만했다. 주인의 친구가 전당포를 운영하는데, 오래 지나도록 찾아가지 않은 것을 헐값에 가져 왔다고 했다. 주인은 무용담 들려주듯 말하며 내 손목에 시계를 채워줬다.
 
이 '오리엔트 손목시계' 덕분에 시간을 지켜 일터로 나갈 수 있었으니 내겐 은인인 셈이다. 학교 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틈틈이 공부해 고입 자격 검정고시를 보게 됐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준비 없이 학교부터 간 게 실수였다고나 할까.
 
입학식 날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 있는 뚝방의 판잣집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궁색 맞은 얘기가 될 줄 알지만, 입학식 날 차비가 없었다. 주위에 빌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내 포기했다. 빌려 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갚을 자신이 없었다. 첫 입학식 날 결석하면 3년의 학창 시절이 어려움의 연속일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혈혈단신의 신세가 이런 상황까지 몰고 가다니! 비상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버팀목이었던 오리엔트 손목시계!
 
그것을 갖고 아침 일찍 전당포로 달려갔다. 저당 잡히면 200원까지 빌려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때 학생 버스요금이 15원 정도 할 때다. 순간의 지혜로 위기를 극복했다며 스스로 위로했지만, 시간 때문에 또 마음 조일 일을 생각하니 긴장감이 몰려왔다.

마치 그 때 그 시계처럼
 

난 그때 전당포에 맡긴 오리엔트 손목시계를 다시 찾지 못하고 말았다. 공부하랴, 생활 앞가림하랴, 형편이 나아질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학생의 힘겨운 일상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생존을 위한 전쟁 말이다. 다행히 어렵게 3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올 고등학교 동기 송년모임 선물로 손목시계를 준비하니 많이 참석하라는 공지가 올라왔었다. 참석자의 이름을 시계에 일일이 새겨준다는 '달콤한' 문구까지 포함돼 있었다. 친구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더해 손목시계 선물에도 솔직히 마음이 갔다.
 
45년 전에 전당포에 잡힌 시계를 찾는 기분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시계를 선물로 준비한 임원들이 내 마음을 엿본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덤으로 아내 것까지 커플 시계를 받아들고 송년모임을 뒤로 했다. 

참으로 힘겨웠던 학창 시절, 해를 거듭할수록 한 편의 드라마가 돼 내 주위를 에워싼다. 한동안 이 손목시계가 내 몸의 한 부분처럼 같이 움직이게 될 것이다. 큼직한 시계가 더 든든하게 보인다.
여기 한 할머니가 있다. 이름은 잔, 나이는 아흔 살, 프랑스의 외딴 시골 농가에서 혼자 살고 있다. 책 <체리토마토파이> 주인공 잔 할머니는 아흔 번째 봄에 일기 쓰기를 시작한다.

그녀는 자유로이 쓸 수 있는 많은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지 않고 늙은이의 특권이라 여긴다. 그 넘쳐나는 시간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날그날의 기분을, 순간순간 떠오르는 추억을 기록한다. 
 
 
파리에 살던 도시 아가씨 잔은 결혼하여 시골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책 첫머리에 '잔의 작은 세상'이라는 그림이 있는 페이지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그 세상 속에서 잔 할머니의 생활이 머릿속에서 3D로 구현되었다.
 
일기에는 잔 할머니의 생활이 나타난다. 봄에서 시작한 이 일기는 여름, 가을, 겨울까지 이어지고 이듬해 봄이 시작할 무렵 끝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정원에서 수확하는 야채들의 종류가 바뀌고 할머니의 산책코스, 옷차림 등이 변한다.
 
잔 할머니는 일정한 시간에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한다. 할머니에게는 친구들이 있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그들과 성당 미사에서 얼굴을 보고, 집에 모여 식사나 다과를 하고 카드놀이를 한다. 이웃에 사는 부부와의 교류도 원만 아니 각별하다. 의리 있는 가정부도 있고 오고 싶을 때만 오는 정원사도 있다.
 
잔 할머니는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삶속에 확실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로 그녀의 삶은 외롭지 않을 뿐 아니라 삶의 주체도 확실하게 그녀 자신이다. 아들과 딸이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명절, 휴가에 번갈아 방문할 때 할머니는 그들에게 먹일 음식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미리 사다 두기도 한다. 자녀의 방문은 반갑지만 그녀의 확실한 생활 습관은 침해받는다.
 
"마지막 손님까지 모두 떠났다. 사흘간 도떼기시장 같던 집이 다시 조용해지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부모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손 흔드는 부모님의 모습이 쓸쓸해 보여 무거웠던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구절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계절에는 잔 할머니도 조금은 외로움, 한적함을 느끼지만 주체적인 삶, 여자로서의 삶을 씩씩하게 이어간다.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나라 프랑스의 시골마을에서의 일 년을 마치 잔 할머니와 같이 살아본 경험이 생겼다.
 
 
여기 또 다른 할머니가 있다. 이름은 최정임, 나이는 일흔 여섯, 한국의 부안이라는 지역에서 남편과 같이 살고 있다. 바로 나의 시어머니이다. 잔 할머니의 생활 모습이 머릿속에서 구현될 때마다 시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서 나타났다.
 
한국의 할머니는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거나 카드놀이를 하지는 않는다. 같은 점은 시골동네에 친구처럼 지내는 이웃이 있다. 그들은 비슷한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의 모습이 뜸하면 안부를 물어온다. 노인회관 또는 그들 각자의 집에 모여 요리솜씨를 뽐내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즐거움을 찾고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잔 할머니를 보며 시어머니를 떠올린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직장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농사를 짓고 동네에서 품앗이로 일을 하기도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들이 아니다.

젊은 시절엔 모진 시집살이를 겪고(잔 할머니도 평범하지 않은 시어머니를 모셨다)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이런 일들을 했지만 어머님은 신세한탄에 빠져있지도 다른 사람을 탓하지도 않았다. 모든 일들을 능동적으로 해냈다.
 
지금도 그렇다. 어머님 아버님이 드실 쌀을 비롯한 각종 곡류와 야채, 과일을 직접 농사짓고, 나와 남편을 비롯한 다른 자녀들 역시 그 수확물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는다. 일흔 여섯의 나이에 아직도 건강하셔서 마을에서 품앗이 손길이 필요할 때마다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 모든 일을 억지로 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노년의 일상을 일만 하지는 않는다. 어머님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낯선 음식을 먹어보고 다른 지역(심지어 다른 나라)에 방문하는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젊은 나보다도 더 용기 있게 다가간다. 시가에서 여자들만 모여 여행을 하는데 어머님은 여행 내내 선두에 서있다.
 
 
책 <두 늙은 여자>, <나이듦, 그 편견을 넘어서기>를 읽고 내가 마주하게 될 노년시절을 막연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소설 속 잔 할머니와 현실에서의 시어머니. 이 두 할머니에게서 나는 구체적인 노년 시절을 대하는 여러 방식을 배웠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든다.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니까. 성인이 되고 점점 나이 들어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면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잡고 싶어진다.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을 많이 한다.
 
이 두 할머니는 멋지게 늙어가는 방식을 몸소 보여준다.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신세한탄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육체는 힘을 잃어도 젊었을 때부터 몸소 익힌 기술과 지혜는 남아있다.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그 순간을 열심히 즐기면서 살기. 이것이 내가 다가오는 노년을 준비하는 대비책이다. 그 대비책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나는 그 모습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먼저 보인다.
 

타고난 팔자는 못 바꾼다지만, 딱 한가지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팔자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이다. 10년째 취업난에 허덕이며 팔자 한 번 바꿔보려고 부지런히 빅데이터 교육을 들었다. 수강생 중에 구민기자가 있었다. 기자의 생활이 궁금하여 동의를 얻어 따라갔다.

해운대구에서 나오는 신문은 2가지가 있다. <해운대신문>과 <늘배움신문>이다. <해운대신문>은 구청 공무원들이 구정뉴스를 싣는 반면, <늘배움신문>의 기사는 해운대 구민이 기자가 되어 직접 취재한 것을 담는다.

매달 발간되는 <해운대신문>과 달리 <늘배움신문>은 3달에 1번, 1년에 4번 만날 수 있다. 2014년부터 해운대구 구민이 직접 기자가 되어 해운대구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구민기자의 기사가 실리기까지 총 4~5번의 모임을 가진다. 마지막 퇴고까지도 고칠 부분이 있었다.

소제목에 줄은 빼고, 마침표를 콤마로 바꾸어야 한다. 구청 회의실에 모인 구민기자들이 퇴고에 집중하여 숨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다. 사진 크기나 위치를 바꿔 보기 좋게 배치하고 오탈자를 점검하며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인다.

해운대구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만든 빅데이터 교육 과정을 통해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꿈을 꾸는 수료생들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12월 15일 일요일에 2019년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늘배움신문>이 나온다. 빅데이터 교육 수강생인 나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다니 더 애정이 간다.
 

빅데이터나 인공지능 교육을 받고 싶어도 서울 쪽에 집중되어 있어 기초부터 혼자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센터에서 강좌를 개설해 준 덕에 3개월 동안 프로그래밍 언어 파이썬을 배웠다. 기초를 배우고 나니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다. 정보산업진흥원에서 하는 인공지능, 파이썬 교육을 들으며 IT 업계에 한 획을 그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해운대구의 교육 관련 소식은 <늘배움신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해운대구 구민이 7인 이상 모이면 강사를 초빙해 원하는 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배달 강좌가 있다. 악기 연주, 서예, 필라테스 등 구민이 원하는 다양한 강좌를 신청할 수 있다. 상하반기 각 1번씩 1년에 총 2번 지원받을 수 있는 배달 강좌는 경쟁이 치열하다. 2020년 1월에 구청 홈페이지에 공고가 뜰 예정이라고 한다.

구민 기자들이 기자만 쓰는 것이 아니다. 해운대구에 행사가 있으면 자원봉사활동을 한다. 지난 10월 제5회 어르신 우리말 겨루기 한마당에서 사진을 찍어 홍보를 하고, 행사 진행 중에 어르신들을 자리로 안내하였다. 대회가 끝난 강당에 남아 뒷정리를 하였다.

구민 기자를 따라 다니며 구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구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구민이 직접 전하니 이보다 더 생생한 뉴스가 있을까? 종이 신문을 보기 어려운 사람들은 카카오톡으로 늘배움신문을 구독할 수 있다. <늘배움신문>에서 찾은 교육을 통해 좋은 팔자로 바꿔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