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외국인이 작곡하는 국악?…실험적인 국악관현악 '이면과 공감'
국내외 작곡가들의 실험적인 국악관현악 작품을 맛볼 수 있는 무대가 관객을 맞는다. 국립국악원은 오는 27~28일 양일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창작악단의 제98회 정기공연으로 '이면과 공감'을 무대에 올린다고 20일 밝혔다.
쪽창으로 아침 해가 슬며시 들어올 때 오경운은 눈을 떴다. 몸이 찌뿌둥하다. 간밤에 땀을 많이 흘려 잠을 설친 탓이다. 9월 하순이지만 고시원을 하루 내내 감쌌던 열기는 밤새 머무르다가 새벽녘에나 겨우 물러났다. 선풍기 한 대 장만한다고 하면서도 미루고 또 미루다 겨우 여름을 넘겼건만...
 
지난 밤 꿈 속에서 오랜만에 아내가 보였다. 눈웃음 가득한 얼굴과 아담한 어깨선이 영락 없는 안사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지만 눈인사만 건네고 아내는 속절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30여 년 전 그날처럼...
 
오경운은 주섬주섬 아침 준비를 시작한다. 그가 사는 집, 아니 머무르는 방은 서울 을지로 5가 중부시장 한 귀퉁이에 있는 고시텔이다. 4층짜리 건물, 두 개 층에 한 평도 안 되는 방들이 다닥다닥 40여 개가 늘어서 있다.
 
오경운이 사는 방은 4층 맨 끝 방. 복도는 한 사람이 겨우 움직일 만한 폭인데 형광등 불빛마저 어둑해 축축한 분위기다. 오른쪽으로는 지린내를 풍기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고, 밥솥 단지가 늘어서 있는 공용 주방이 있다. 그 옆에 410호 문패를 달고 있는 방이 오경운의 보금자리(?)다. 

내 보금자리는 을지로 중부시장 고시텔
 

방을 들어서면 침대가 절반을 차지한다. 한 켠에는 조그만 옷장이 매달려 있다. 그 안에는 오경운이 아끼는 정장(최근 10여 년간 입어본 일은 없다) 서너 벌이 가지런하다. 방안을 가로지른 빨랫줄에는 속내의들이 줄지어 널려 있다. 발 하나 겨우 뻗을 수 있는 방바닥엔 커피포트에 '후라이팬', 양념간장, 조그만 도마까지 이런저런 세간들이 비집고 앉아 있다.
 
그는 방안에서 취사한다. 공용 주방은 동작 빠른 젊은 사람들 차지라 어쩔 수 없다. 코펠에 어제 남은 찬밥을 데우고, 김치찌개를 곁들이면 그게 전부다. 국물이 있어야 먹는 습관 때문에 김치 한두 보시기에 대파 썰어 넣고 고추장 휘휘 저어 끓인 찌개다. 끼니를 거르면 다리에 힘이 없어 이렇게라도 챙기려 한다.
    
아침을 때우고 그가 향하는 곳은 을지로 4가에 있는 '느린걸음'과 '유니콘'이란 회사다. 그곳에서 그는 '근조기 배달'과 '지하철퀵' 일을 하고 있다. 장례식장에 가서 '근조'라고 새겨져 있는 깃발을 설치하거나 소소한 물건들을 배달하는 게 그의 업무다.
 
오늘은 먼저 경기도 평택의 장례식장으로 가서 근조기를 설치해야 한다. 그가 사무실에 가기 전 들르는 곳이 지하철 화장실. 고시텔은 늘 샤워 전쟁, 볼일 전쟁이다. 4층에 기거하는 사람만도 스무 명 가까운데 그 많은 사람이 여름에 샤워 꼭지 하나에 매달려 살았다. 아침 용변은 더더욱 큰 일이다. 변기가 하나니 늘 밖에서 "언제 나와요? 전세 냈나?"하면서 목소리가 높아지기 일쑤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역을 택했다. 거기도 썩 편하지는 않지만.
 
오경운이 고시텔 생활을 한 지는 벌써 6년째. 얼마 전까지는 엘리베이터도 있는 건물에 방도 조금 넓직한 곳이었지만 한 달 세가 40만 원이 넘었다. 부담이 되어 25만 원을 받는 이곳으로 옮겼다.
 
옮겨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용변과 식사 준비는 말할 것도 없고 오래 전 사고로 내려앉은 엉치뼈에 82년 된 무릎을 이끌고 4층까지 오르면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주변에 그 흔한 편의점도 없어 쌀과 김치를 제때 들여놓지 못한 적도 있었다(요즘엔 인터넷으로 쌀과 김치를 주문하면서 고시텔 살아가기 요령을 터득하는 중이다). 그래도 하루하루 꿋꿋이 버텨온 나날들이다.
 
평택 행으로 시작한 오늘, 마지막 일과는 영동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다. 다들 꺼려하는 곳. 깃대와 거치대, 상자 무게를 합치면 제법 무거운 박스를 메고, 한티역에서 병원까지 걷기에는 먼 길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하루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마음이 뿌듯하다. 속으로 오늘 하루 벌이를 헤아려 본다. 5만 원이 넘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마지막까지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기를    

그가 이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6년 남짓. 10여 년간 해왔던 공공기관 경비를 그만두면서부터다. 그는 "힘 있을 때 내 손으로 일하고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겠다"며 한사코 말리는 아들 내외를 뒤로했다. 그리고 회사 근처 고시원에 자기 발로 들어갔다.

돌아보면 속초 앞바다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일이 뒤틀려졌다. 젊은 시절 고모부가 물려준 목재소는 장사가 쏠쏠했다. 당시 설악산 개발 붐도 덕을 보았다. 하지만 사업을 조금 더 키워보겠다고 1989년에 회사를 옮기면서 엇나갔다. 우선 낯선 땅에서 거래처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또 그때부터 플라스틱 제품이 목재를 대신하면서 수요가 많이 줄었다.
 
결국 목재소를 접고 다시 시작한 것이 섬유사업. 사우디로 트레이닝복 원단을 수출하는 일이었다. 장안평에 터를 잡고 오더를 받았지만 염색 실패로 1, 2차 클레임 끝에 파산했다. 모두 땡처분하고 건물주가 건네준 이사 비용을 받고 몸만 빠져나왔다.
 
나쁜 일은 홀로 오지 않는다고 그때 아내가 간암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날부터 오경운은 두 남매를 챙기고 집안일을 돌보며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엉치뼈마저 다쳐 4개월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고단하고 쓸쓸한 중년이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오경운이 '근조기' 배달 일과 지하철 퀵을 하며 제일 힘들었던 것은 바로 길 찾기였다. 지도를 이리저리 찾아보고 전화로 몇 번씩 물어보고, 영어 간판 때문에 헛갈리고 핀잔도 많이 들었다. 맘고생이 많았던 초보 시절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익숙해져 '카카오맵'으로 길찾기를 하는 덕에 그 애로는 사라졌다. 더욱이 검색한 행선지도 어플 기록으로 남아 있고 세월이 쌓이다 보니 웬만한 곳은 이제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질 정도다.

그런데 가끔 정신이 깜박할 때가 많아 근조기나 서류를 놓고 전철에서 내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이 황황하다. 그래서 그는 지하철을 탈 때 승강장 번호를 꼭 기억한다. 그래야 유실물센터에 잃어버린 위치를 정확하게 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게 좋기에 요즘은 물건을 꼭 끌어안고 있는다.
 
이렇게 해서 그가 한 달에 버는 돈은 1백만 원 남짓, 노령연금 25만 원과 중구청에서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10만 원을 합하면 방세 내고 용돈 쓰는 데 지장은 없다.
 
오경운은 남는 돈을 꼬박꼬박 저축하고 있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일하다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설령 요양원에 가더라도 자식들에게 부담주지 않고 자신이 모은 돈으로 요양비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마지막 행선지 한티역에서 을지로 4가역까지는 한 시간이 안 걸려 도착했다. 지하철 출구를 나서니 멀리 북한산 쪽에서 다가온 자주색 노을이 오경운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저녁 바람이 제법 선선해 옷깃을 펼치니 시원하고 마음마저 개운하다. 오늘은 배달이 네 건이나 되었고 땀도 많이 흘렸다. 이런 날은 누군가와 소주라도 한잔 하면서 같이 저녁을 먹고프다. 
 
고시텔로 향하는데 그가 가끔 들르는 소머리국밥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식당 앞에서 누군가 손짓을 하는 모양새다. 침침한 눈을 훔치며 바라보니 아담한 어깨선, 그윽한 눈매에 눈웃음까지... 아! 어제 밤 꿈에 만났던 아내, 틀림없는 아내의 모습이다.
 
오경운은 반가워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내려앉은 엉치뼈에 다리를 절며 바삐 걸어갔다. 손을 들어 기다리라고, 가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이 잠겨 말이 잘 안 나온다.
 
황급히 걸어가는 그의 손에 지난해 여름, 올해 여름에도 미루고 또 미뤄왔던 선풍기 한 대가 들려 있다. 그를 뒤따라가는 노을은 어느 틈엔가 보랏빛으로 바뀌어 늘어진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못다 한 이야기>

오경운 어르신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고 30여 년을 살았습니다. 처가에서는 이 점에 대해 특별히 고마운 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엄마 없이 자식들을 키우고 경제적으로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해 하며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가 특별합니다. 오죽하면 반찬을 해나르는 자식들에게 그마저도 하지 말라고 고시텔 위치도 알려주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당신은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인터뷰 내내 강조했습니다. 

<오경운의 B컷>
  
새 시민기자의 첫 기사였다. 새 시민기자의 첫 기사에는 뉴(NEW)라는 의미의 N자 버튼이 보인다. 어떤 분이, 어떤 글을 썼는지 자못 기대되는 순간이다.

그 분이 쓴 기사는, 출산 이후 모처럼 두 아이를 데리고 긴 휴가를 떠났는데 유럽의 박물관 등 공공기관에서는 좀처럼 수유실을 찾기 힘들었다는 이야기였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도 수유실이 없기는 마찬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닫힌(closed) 화장실에서 수유하다 생긴 일에 대해 쓰셨다. 문장도 안정적이고 재미도 있고 공감도 가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기사를 보는 내내 의문이 생겼다.

'정말 수유실이 없을까? 박물관이 너무 넓어서 혹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못 찾은 건 아닐까? 이걸 어떻게 확인하지? 수유실 없다고 기사가 나갔는데 어딘가에서 '수유실 있어요!' 하면 큰일인데...'

시민기자를 못 믿는 건 아니었다. 다만,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 이게 에디터로서 내가 해야하는 일이니까. 짧은 영어 실력으로 루브르박물관 홈페이지를 뒤져봤다. 내가 찾고 싶은 내용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 루브르박물관이 어떤 곳인가. 비록 나는 못 가 봤지만, 워낙 유명한 관광지니까 내 페친(페이스북 친구) 중에 혹시 가본 사람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주저없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실제 프랑스에 사시는 페친도 있어서 혹시나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진짜 수유실이 없나요? (가본 적이 없어서 궁금한 1인, 이 아니고 수유실이 없었다는 기사가 들어왔는데, 진짜인지 확인이 필요한 1인)"

몇몇 분의 댓글이 달렸다. "흠..."이라는 '모른다형'부터 "수유실엔 관심이 없는 1인", "요구하면 (수유실을) 마련해 줄 것 같은 프랑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다"는 '희망형'까지 반응은 다양했지만, 정작 수유실 존재 여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댓글을 단 한 시민기자가 말했다.

"일단, 박물관에 물어보고 연락드릴게요! ^^"

네? 네네? 네네네? 루브르박물관에 물어본다고요? 전화를 해보시겠다고요? "실화냐?"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오마이뉴스>에 사는이야기와 책동네 기사를 쓰는 이창희 시민기자였다. 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이 달렸다.

"일단 통화중이라니, 쫌만 기다려 주시어요~~ ^^"
"계속 통화중이기도 해서, 메일을 보내놓기는 했어요! ^^ 연락 오는 대로 회신 할게요~."
"방금 통화 완료!!!!"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그가 확인해 준 내용은 놀라웠다.

"단호하게 없다는데요? 수유실 없고, 그럼 뭔가 수유를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없냐고 물었더니 미안하다면서도 단호하고 쌀쌀맞고 당당하게 '없다'고 해요. 역시 프랑스! 그런데 수유실이 없다는 것에, 그다지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말투가 엄청 당당했거든요."

깔끔한 미션 완료.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해야했다. 편집기자도 못하는 걸(영어가 짧아가지고 흑흑) 시민기자가 훌륭하게 서포트해 주셨으니까. 이런 우여곡절 끝에 꼼꼼하게 사실 확인까지 마친 기사라고 쓰고 해당 기사의 링크도 밝히고 싶지만, 이 기사는 독자들을 만나지 못했다. 왜 그랬는지는 다음 글에서 밝히겠다. 
어스름히 깔린 노을을 등지고 집에 들어선다. 퇴근 후 곧바로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오늘은 무엇을 만들까? 냉장고를 열어보니 울퉁불퉁한 감자와 눈이 마주친다. 감자볶음을 만들어봐야겠다. 재빨리 감자를 채썰어 볶아낸다. 하루 내내 일하고 피곤하긴 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유일하게 아내와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뜨거워진 조리기구 만큼이나 달아오른 얼굴에서 하품이 절로 나고 피로가 쏟아진다. 요리를 도와달라고 할 법하지만 아내는 온 방을 헤집고 다니는 아이 뒤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어 보인다. 어릴 때 보았던 만화인 톰과 제리의 추격전을 보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만지고 싶어 하는 아이와 어지럽혀진 집안을 보기 싫은 엄마의 추격전은 네버엔딩 스토리이다.
 
오랜 자취 생활로 인해 요리에 대해선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수준급이라고 자부한다. 아내도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취 요리 마스터인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주방은 나의 영역이 되었다.
 
사실 요즘은 굳이 요리를 할 필요가 없다. 데우기만 해도 훌륭한 한 끼 식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완제품들이 시중에 많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만들어낸 요리보다 맛도 훨씬 좋다. 늘어나는 1인 가구 수에 맞추어 제품의 종류 또한 다양하다. 완제품을 자주 먹는 혼자 사는 지인의 경우 집에 있는 유일한 조리도구가 전자레인지일 정도로 쉽고 간편하다. 그렇다보니 요리라는 예술적 행위에서 사람들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SNS에서 지역소식을 보다가 집 근처에 있는 농촌진흥청에서 우리 농산물로 만드는 요리공모전을 개최한다는 게시물을 접했다. 일상적인 음식을 만드는 실력이지만 요즘 세태에 미뤄볼 때 내 실력 정도면 도전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등에 업고 공모전 도전을 감행했다. 먼저 무엇을 만들지 고민했다. 도전자들 중에는 주부 9단인 프로주부님들도 있을 것이고 요식업에 종사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전문가들을 제치려면 일반적인 음식을 선보여선 안 될 것 같았다.
 
당시 아이가 미음을 먹기 시작해 쌀가루를 만들어서 여러 종류의 미음을 만들고 있었다. 모든 생활이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보니 공모전에 제출할 요리 또한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준비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도 먹을 수 있고', '우리 농산물로 만들어진' 요리를 고민하다 아이 미음을 만드는 방식을 응용한 쌀아이스큐브를 만들게 되었다. 그다지 멋있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아이에게 특화된 음식이라는 것을 무기삼아 심사 자료를 준비했다.
 
 
조리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설명을 곁들여 제출했다. 그다지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본 것에 만족했다. 공모전 도전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바로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시상식장에서 만난 수상자들은 학생부터 중년의 성인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다들 어떠한 계기로 지원했고 어떤 직종에서 종사하는지 궁금했다. 마침 행사 시작 전에 사회자가 수상자들을 향해 요식 업계에 관련되신 분이 있는지 질문을 건넸다.

요리공모전이다보니 업계에 종사하시는 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를 제외한 전원이 그렇다고 대답할지는 몰랐다. 질문 이후 비전문가인 내가 여기 앉을 자격이 되는지 괜스레 불편해졌다.
 
시상식에 앞서 수상자들이 응모했던 요리의 사진들이 공개 됐다. 역시나 프로의 세계는 다르긴 했다. 집에 있는 식기 중에서 괜찮은 걸 쓴다고 썼지만 전문가들이 플레이팅에 쓴 식기에 비하면 후줄근했다.

레스토랑에 나올 법한 접시에 플레이팅 된 음식과 반찬종지에 덩그러니 담긴 내 음식은 외관부터 확연이 달랐다. 한껏 멋부린 음식들 사이로 내 요리가 소개됐을 때 참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특정계층을 공략한 탓에 선정이 되었지 실력으로는 시상의 근처에도 못 갔을 것이다.

시상식에서는 상장과 함께 수상내역이 적힌 보드판이 수여됐다. 단순한 보드판일 뿐인데 주변 맛집으로 등극시켜 줄 것 같은 힘을 지닌 것 같았다. 만약에 내가 요식업 종사자였다면 가게에 멋들어지게 디자인이 된 보드판을 내걸었을 것이다.
 
요리대회 수상 게시물의 힘을 체험했던 적이 있다. 한때 자주 갔던 김치찌개 맛집이 있다. 변덕스런 입맛 때문에 여러 음식점을 전전긍긍하다보니 최근엔 발길을 향하지 않았었다. 옛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 했던가? 기억 속의 그 맛이 그리워져 다시금 김치찌개 집을 찾았다.

오랜만에 방문한 김치찌개 집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무슨 경사가 있었던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지역에서 개최된 향토음식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멀리서도 보일정도로 커다란 현수막은 주인아주머니의 자긍심처럼 보였다. 가게 실내에 들어서니 역시나 음식대회 수상을 축하하는 게시물들이 여럿 붙어 있었다. 요리대회에 우승했다는 소식을 보고 먹어서 그런 건지 음식 솜씨를 갈고 닦은 것인지 김치찌개가 유달리 맛있게 느껴졌다.
 
요리대회 수상은 요리사 자신만의 명예뿐만 아니라 가게의 명예도 가져온다.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경쟁하여 우승했다는 것은 가게의 맛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 수식어가 하나 생김으로써 요식업 매장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이번 수상을 통해 '호텔주방장 출신이 만드는 맛집', '3대째 이어가는 맛집', '요리대회에서 우승한 맛집' 등 음식점을 수식하는 여러 단어 중 하나를 쓸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다. 하지만 요식업과 관계없는 분야의 사무직 직원인 나에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돼지 목의 진주' 격이었다. 어렵사리 받은 수식어를 굳이 활용하자면 '대회에서 상을 탄 요리 잘하는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요리 공모전에 응모했을 당시에는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모전에 당선이 되면 되는 것이고 떨어지면 그만이었다. 비전문가들도 요리공모전에 많이 응모를 했을 것이며 일반인도 여럿 수상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요식업이라는 치열한 무대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만 느꼈다.
 
세상 살기 참 녹록지 않다고 느낀다. 어떤 분야이든 그들만의 리그에서 일반인이 살아남으려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품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실력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라 생각한다. 요리대회는 요리사만의 전유물이 아니지만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직장운이라는 것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사업에도 운이 따라야 하지만 직장 일에도 운이 따라야 한다. 보통 직장운이라고 생각하면 입사운이나 승진운을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직장운은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인복(人福)이 있어야 직장을 오래 다닐 수 있느냐 아니냐로 결정될 수 있다고 본다.

직급이 낮을 때는 상사를 잘 만나는 것이 좋고, 직급이 올라가면 부하직원을 잘 만나야 직장생활이 편안하다. 누군가는 사내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결국은 사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18년간 한 직장을 다니는 데에는 운이 많이 따랐다. 내가 직장운이 좋다고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일의 특성상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났고, 두 번째는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인복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성격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 이상이다. 배울 만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근무하는 곳의 이동이 잦았다. 프로젝트의 특성상 고객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으므로 근무지 이동이 달랐던 것이다. 굳이 회사를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다. 어느 날은 부천에서 근무하다가 구로, 사당, 또는 해외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프로젝트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닐 때 가장 좋은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좋은 사람, 좋은 상사를 많이 만났다. 반대로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만났다. 그런 경우는 조금만 참으면 됐다. 몇 달 후 프로젝트가 끝나면 헤어질 것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와 언쟁을 피하게 해줬다. 신기하게도 일로 인해 언쟁을 심하게 한 사람도 프로젝트 종료 후 일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일로 인해 언쟁은 했을지언정 사람이 미운 것은 아니었으니까.

사람에게서 배운다
 
     
나는 전산 비전공자였다. 그런 내가 IT 회사에 취직을 했으니 배울 것이 얼마나 많았겠나. 회사에서 프로그래밍 교육해주고 인재육성을 하긴 했으나, 막상 프로젝트 현장에 투입되면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그래밍에서 중요한 것은 수학적 사고였다. 분명 이렇게 하면 성공하리라 예상한 코딩은 에러를 불러오기 일쑤였다. 자괴감이 들고, 적성에 맞지 않으니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수없이 생각했다.

한 번은 통계 프로그램을 만들 때의 일이었다. 통계 프로그램은 오류보다는 성능이 중요했다. 많은 데이터를 처리해서 결괏값을 추출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괏값을 추출하는데 3~4시간이 걸렸다. 기대 시간은 30분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각 분야의 담당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다른 파트의 A 부장님께 한 번 도움을 요청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A 부장님은 협력업체 직원이었다. 보통 일이 바쁘니 남의 파트 일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문화였다. 그래도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어 A 부장님께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상황과 내용을 듣더니, 어떤 업무에 관련된 통계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업무 설명을 먼저 해달라고 했다. 통계 성능을 높이고 많은 양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일인데 업무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해달라고 하니 최대한 자세히 전했다. A 부장님은 하루 정도 생각해 보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A 부장님은 해결한 것 같으니 테스트를 해 보자고 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3~4시간 걸리던 프로그램은 30분 만에 결과를 출력해냈다.

나중에 비교해 보니 소스코드의 양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A4용지로 2장이 넘었던 소스코드의 양은 1장 정도로 줄어 있었다. A 부장님의 해결 포인트는 업무였다. 업무의 특성을 이해하고, 데이터 추출의 범위를 줄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락도 없었다. 마치 생선회를 뜨는데 고수가 잔뼈마저 다 제거하고 딱 살만 발라낸 느낌이라고나 할까. A 부장님께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는데 자괴감이 들었다. 며칠 동안 헤매던 일을 단 하루만에 해결하다니.

나중에 A 부장님께 감사의 인사로 술을 한잔 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제가 해결돼 정말 감사한데, 한편으로는 나는 왜 못했을까를 생각하니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이 과장님, 문제 해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어요. 과장님은 코딩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고객응대도 해야 하고, 보고서도 써야 하고, 개발자들 진척관리도 해야 하고요. 저는 24시간 내내 그 문제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집중할 수가 있었던 거고요. 제가 그 일을 해결하는 동안 집중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셨잖아요.

또 하나, 과장님이 잘하는 일은 문제해결에 적극적이라는 거예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해결할 만한 사람을 찾아서 부탁할 줄 아는 것도 관리자의 중요한 능력이에요. 저는 관리는 못해요. 관리를 못해서 지금까지 프로그래밍만 하고 있잖아요. 각자 타고난 능력과 경험치가 다르고, 그걸 이용하는 게 회사라고 생각해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문제해결에는 과장님의 공도 커요."


그분의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기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인사이트를 배울 수 있었다. 회사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결국 나를 지금까지 계속 다니게 붙잡아둔 건 사람이었다. 물론 안 맞는 사람도 많았다. 자신에게 일이 떨어지면 무조건 남에게 떠넘기는 유형도 있었고, '까라면 까야지'라는 권위주의적인 상사도 만나봤다. 모든 성과를 자신만 챙기는 사람도 만나봤다.

그런 인간 유형이 곁에 있으면 괴롭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프로젝트가 끝나면 헤어지게 되니 조금만 참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다른 이에게 일을 떠넘기는 유형도, 권위주의적인 상사의 유형도, 결국 회사의 이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만나면 협력하게 돼 있었다. 협력을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하나씩은 있었다. 하다못해 '난 나중에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지'라도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이 비전이다
 
 
일의 성취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 이십 년 가까이 회사에 머물게 했다. 비전은 회사의 교육이나 회사 소개서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주위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은 비전을 본다. 사장이나 임원보다 바로 곁에서 일하는 동료나 선배에게서 배울 점을 보고 성장과 비전을 느끼는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A 부장님 이외에 나의 첫 사수와 주위의 훌륭한 동료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그들이 있었기에 프로젝트도 성공할 수 있었고, 서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후배들에게 배울 만한 사람인가?'

내가 누군가에게 배우며 성장했듯이, 후배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생각한다. 프로젝트에서 나와 같이 일하게 된 것을 알게 된 후배가 "그 선배 참 좋아, 배울 점도 많고"라는 말을 하게 된다면 좋겠다. 나도 누군가의 인복이길 바란다. 그것이 앞으로 내 직장 생활의 비전이다.
수도없이 금연에 실패하는 이유와 해법을 8회에 걸쳐 싣습니다. 자신을 경멸하지 않도록요. 그리고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할 부분도 공유하고 싶습니다. - 기자말

주변의 지인 중 불굴의 의지로 공부와 연구에 매진해 젊은 나이에 국내 유수 연구기관 분원의 원장이 되신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분과 만날 일이 생겼는데 헤어질 무렵 담배를 3개비나 연달아 피우시더군요.

왜 이렇게 많이 피우시냐 했더니 집에 가면 못 피우니까 미리 피운다는 겁니다. 아내분께서 담배를 끊은 걸로 알고 계시기 때문에 집에서는 못 피우고 밖에서만 몰래 피운다는 얘기였죠. 월요일 아침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분의 웃음에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담배를 끊으시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수백차례 시도했는데 안 돼서 그냥 포기했다"는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수백차례'라니요. '저렇게 훌륭하신 분도 금연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니 저같은 인간은 그냥 피울 수밖에 없겠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도대체 왜 금연이 안 되는 것일까요?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것을 수백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저는 다른 많은 방법을 찾았고 시도했습니다. 그중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이유는 잘못된 방법으로는 당연히 금연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또 방법이 잘못된 것이지 당신이 못나고 어리석어서가 아님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느날 저는 유튜브를 검색해보았습니다. 금연과 관련한 영상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금연최면, 금연명상, 금연강의란 영상들이 여럿 눈에 띄었고 모든 영상을 한 차례씩 보았습니다.

그중 한 영상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신이 담배를 끊고 싶으면서도 계속 피우는 이유는 스트레스에 대한 무의식의 방어기제다. 그러니 자신을 탓하지 말고 먼저 안아주고 사랑해주어라, 그러면서 금연에 차차 도전하면 꼭 성공할 것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제 의문에 답이 내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 몸을 통제하는 '뇌'란 녀석은 담배가 몸에 해로운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도대체 왜 담배를 피우라는 명령을 계속 내릴까'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추후에 다시 다루겠습니다).

영상을 듣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영상에서 들려준 이야기처럼 제 자신이 안쓰러웠고 왠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상을 보고 다음날 오전 11시 무렵까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11시 넘어 직장동료에게 한 개비를 얻어 피우곤 다시 한 갑을 사버렸지요. 그때 느낀 좌절감, 자괴감은 익숙함을 넘어 반갑기까지 했습니다. '역시 난 구제불능이야'라는 결론과 함께 말이지요.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금연 책입니다. 회사에 고위 임원이 새로 부임했는데 대화를 나누던 중 우연히 담배와 금연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본인도 수십년 담배를 피웠지만 지금은 끊었다는 것입니다. 방법을 여쭙자 책을 한 권 추천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서점으로 달려가 당장 구입했지요.

이 책은 담배를 피우는 이유를 원점에서 상세히 분석하고 그 이유들을 조목조목 따지며 사실은 담배를 피울 이유가 없음을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대단히 좋은 책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책을 읽고 담배를 끊은 사람이 세계에 수십만이 된다는 문구도 보았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그 책을 읽고 충분히 담배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말이지요.

그러나, 저와 같은 의지박약의 인간들에겐 합리성이 먹혀들지 않더군요. 책을 다 읽고 하루가 못 되어 편의점으로 달려가 담배를 '또' 샀으니까요. 안타까운 사실은 며칠 후 만난, 책을 소개해준 그 임원의 셔츠 주머니에 담배가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뇌훈련, 운동요법, 금연최면, 금연파스, 금연침, 금연껌, 니코틴 없는 전자담배 등 금연과 관련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방법들을 시도해보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스스로에게 과도한 낙인을 찍게 되더군요. '구제불능' '의지제로'에 이어 '인간말종'까지요. 자신감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나중에는 유전자 탓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본래 태어나길 금연을 할 수 없는 의지없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내가 그렇게 태어났으니 나 때문이 아니다'는 비겁한 생각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는 분명히 금연에 성공을 합니다. 금연에 성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금연을 할 수 없도록 태어난 것일까요? 우리의 '미친 뇌'는 왜 자꾸 담배를 피우라고 계속 명령을 내릴까요? 누군가에게 금연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요? 왜 우리는 어제 버린 담배를 찾아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그 이유를 이제부터 4살배기 저희 딸과 핵주먹으로 유명한 미국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이 알려줄 것입니다.

(*다음 회에 계속)
이 글은 초등학교 5학년 강물과 마이산이 엄마가 함께 나누는 책이야기입니다. - 기자말

나는 새로운 책을 접하면 줄거리, 목차, 작가에 대해 살펴보는 편이다. 웹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만난 책 <회색 인간>은 신선하고 작가 김동식은 매력적이었다. 옆에 있던 남편에게 작가의 이력을 읊어주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주물 공장에서 10년 동안 노동을 했어. 게다가 평생 읽은 책이 2권 뿐이래. 지금까지 써온 단편 소설이 500편이 넘고, 지금도 계속 쓰고 있대."
 
흥분한 내 목소리를 듣고 옆에 있던 강물이의 질문.

"엄마, 그래도 작가가 될 수 있어? 무슨 책이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된다. 며칠 후 군산의 한길문고에 김동식 작가가 온다는 포스터를 접했다. 포스터를 본 강물이의 말.

"나도 갈래. 엄마 이 책 사줘. 꼭 읽어 볼 거야."
 
학교에서 돌아온 강물이는 책을 찾았다. 나는 어린이용 책이 아니어서 '읽다 말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담아 "단편 소설이라서 이야기가 짧아. 처음 3개 정도만 읽어봐"라며 책을 주었다. 마이산에게도 같은 말을 해줬다.

"처음 이야기 3개 정도만 읽으면 강연 듣기가 더 좋을 거야."
 
강물이는 김동식 작가에게 푹 빠졌고 나 역시 그랬다. 뒤늦게 책을 읽기 시작한 마이산도 마찬가지였다.
 
강물 : "엄마, 책이 어렵지 않아. 어른 책인데."
마이산 : "나도 나도. 뭔가 새로워. 좀 이상하기도 해. 그런데 재밌어."
 

다음날 강물이는 <회색 인간>을 학교에 가지고 갔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결국 완독했다.
 
강연 당일, 강물이와 마이산은 각자 작가에게 질문하고 싶은 내용까지 정해두었다. 김동식 작가의 강연은 그의 솔직함으로 시작했다. 그 솔직함이 나 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인 강물이와 마이산을 사로잡았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게임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시작한 PC방 알바. 서울로 상경해서 시작한 주물 공장의 일. 급여가 2배 이상이어서 만족스러웠던 일이 너무 단조로워 시작한 공상. 그 공상이 머릿속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인터넷 게시판에 실려 인기 글이 되고 그 글들이 모여 책이 되는 이야기. 머릿속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던 김동식 작가는 글 쓰는 법을 몰랐다.
 
"평생 읽은 책이 열 권이 안 되고... 그것도 교과서에 나오는 것들일 거예요. 글을 쓰고 싶은데 배운 적이 없으니까 네이버에 들어가서 '글 쓰는 법'을 검색했어요. 보니까 기승전결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접속사를 많이 쓰면 안 되고, 간단명료하게 써야 하고, 그런 내용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배운 대로 써서 글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의 이야기가 글이 된 과정이다. 그는 솔직하고 겸손하다. 그는 상대의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그의 강연을 들으며 내가 생각한 그는 그렇다.
 
그의 인생이 하나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속에 중요한 울림이 있었다. 그의 마음가짐,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나의 마음속에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스스로 맞춤법에 약하다고 했다. 그는 그의 글에 맞춤법 지적을 당하면 댓글에 "감사합니다"를 먼저 썼다고 한다. 그 후 똑같은 맞춤법은 틀리지 않도록 노력했고 사실 그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른 강연 후기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게시판에 글 쓰던 시절의 댓글 : "작가님의 이야기에 개연성이 너무 없어요."
김동식 작가 : "댓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개연성이 뭔가요?"  
 

맞춤법과 마찬가지로 그는 개연성에 대해 배웠다. 독자들의 댓글을 무조건 감사해하며 배우려고 하는 자세를 가진 그는 발전하는 게 당연했다. 옆자리에 있던 강물이와 마이산을 슬쩍 봤다. 지루해하지 않으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작가에게 보내며 강연을 듣고 있었다. 아이들은 책에서 읽었던 에피소드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뿌듯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강물이는 묻고 싶었던 질문이 강연 중에 설명이 되어서 아쉬워했다. 마이산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했다.
 
마이산 : "글을 쓰다가 쓸 수 없을 때(막힐 때) 어떻게 하나요?"
김동식 작가 : "아무것도 안 합니다."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작가는 쓰다가 막히면 미련 없이 그만 쓴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가 그의 컴퓨터 메모장에 100여 개가 넘는다는 부연설명까지. 마이산은 작가에게도 쓰다 만 이야기가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나는 책산책(책모임), 에세이 쓰기에서 들은 책, 배운 내용 등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준다. 물론 강의처럼 하지 않고 흘려듣도록 유도하면서 가장 재밌었던 내용, 흥미를 가질 만한 내용으로 간추려서 한두 문장만 던져준다. 그 영향인지 요즘 아이들은 부쩍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보인다.

처음엔 아직 어린 아이들이 어른 책을 접하기에 어려울 것 같아 만류하기도 했다. 어떤 글에서 '아이들은 어른의 생각과 다르게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인다'는 내용을 접하고, 그 뒤로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보도록 했다. 아이들이 질문을 하면 내가 아는 범위에서 답해주고 내가 모르는 내용은 같이 검색해서 찾아보기도 한다.
 
그날 아이들과 나는 책에서 그 책을 쓴 작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가 배운 내용은 각자 다를 것이다. 그 속에서 겹치는 부분은 분명하게 있었다. 그 겹치는 부분으로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 공감대 속에서 나는 '아이들이 많이 자랐다는 뿌듯함', 아이들은 '엄마 책을 읽고 같이 강연을 들은 자부심'으로 같이 행복해했다. 김동식 작가의 상상력과 성실함이 우리에게도 전해졌고 계속 자라고 있는 중이다.
 
수도없이 금연에 실패하는 이유와 해법을 8회에 걸쳐 싣습니다. 자신을 경멸하지 않도록요. 그리고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할 부분도 공유하고 싶습니다. - 기자말 

▲ 흡연 기간 23년
▲ 금연 시도 기간 8년(2011년 12월~2019년 6월, 102개월)
▲ 어제 버린 후 다음날 새로 산 담배 730여 갑

"죽을 병 걸려봐야 정신 차리고 끊지."

주변의 많은 분들이 담배 피우는 분들을 보고 저렇게 얘기합니다. 지금이야 몸이 멀쩡하니까 담배를 피우지만 큰 병이라도 걸리고 나면 담배를 끊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위에서 언급한 놀라운 금연 시도 횟수의 이력을 갖고 있는 제 경우를 보면 아닌 듯 합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8년전 뇌척수염이라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병에 걸렸습니다. 2주간 혼수상태에 빠졌고, 젊은(당시 31살) 청년이 긴 시간 깨어나지 못하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의료진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기적적'으로 깨어났을 땐 걷지도 못했고, 형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호스를 꽂아 소변을 빼내야 하는 '고장'도 발생했습니다. 위에 '기적적'이라고 한 것은, 죽음의 문턱 바로 곁에 갔을 만큼, 제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몸이 어느 정도만 회복되었을 때, 그러니까 소변 고장이나 기억상실이 낫기 전에 퇴원을 하면서 의사 선생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식이 돌아오고 깨어난 것만 해도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입니다. 퇴원해서는 술과 담배를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저는 과연 담배를 끊었을까요? 자식을 앞세울까 두려워 제 입원기간 내내 매일 새벽 새벽기도를 나가고 부지런히 보양식을 나르던 저희 부모님의 기대는 지켜졌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퇴원 후 초기엔 피우지 않았지만 몸이 점차 나아지면서 다시 피우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입장에서 본다면 참 나쁜 자식인 셈이죠. 그래도 담배는 끊지 못했습니다. '큰 병 걸려봐야 담배 끊는다'는 말처럼, '결혼을 하면 담배를 끊는다' '아내가 임신 하면 끊는다' '아기를 낳으면 끊는다' '회사를 그만두면 끊는다' 등등 금연과 관련해서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제 경우를 보면 모두 아닙니다.

그동안 만나온 많은 사람들을 보면 꼭 저만의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담배를 끊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요? 도대체 왜!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도 끊어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엔 정말 의지만으로 끊어내신 위대한 분들과 혹은 그냥 생각없이 안 피웠더니 계속 안 피게 되더라는 축복받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분들은 제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담배를 끊겠다며 버린 담뱃갑을 찾아 다음날 쓰레기통을 뒤진 횟수가 적어도 40~50번은 되는 분들, '나에겐 의지라곤 없구나' 자책하며 자신을 미워하고 경멸해온 분들, 그리고 부모님과 아내(혹은 남편)와 자식 앞에 미안하고 부끄러웠던 경험을 가진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금연은 가능합니다. 의지박약이라면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저도 끊었으니까요. 죽을 병에 걸려도, 결혼을 해도, 아내가 임신을 해도, 사랑하는 아기가 태어나도 못 끊던 저도 끊었으니까요. 세상 모든 분들이 금연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금연에 실패한 이유는 그저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못나고 어리석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어제 담배를 끊겠다는 결심과 함께 남은 담배를 호쾌하게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오늘 아침 쓰레기통을 뒤진 당신. 자책하지 마시고 이어질 글들을 꼭 한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길 바라며 이 글을 씁니다. 지난 8년간 제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