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싸거나 참거나... 화장실, 인간답게 사는 최소한의 조건"
사람이 하루 살면서 자주 가는 곳 중 하나는 화장실이다. 화장실은 주로 소대변 보러 가지만 또 손 씻기나 용모를 단정히 하러 찾는 곳 또한 화장실이다. 그런데 화장실을 자유롭게 못 가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된 걸까?
지난 8일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싸느냐, 참느냐 화장실 전쟁' 편이 방송됐다. 이날 방송에서는 많은 이유로 화장실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담았다. 취재 이야기가 궁금해 지난 17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EBS 사옥에서 해당 다큐 연출한 박혜민 PD를 만났다. 다음은 박 PD와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화장실 이야기, 얼마나 힘들까"
- 화장실에 대한 취재는 어떻게 하게 되었어요?
"여러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제가 <다큐 프라임>의 아이템 선정할 시기 저희 집에 에어컨 설치 기사님이 에어컨 수리하러 오셔서 1시간 정도를 수리하고 가셨어요. 수리하던 도중 저에게 화장실 좀 써도 되겠느냐고 얘기하셨어요. 근데 그때 그 표정이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무 비굴한 표정 지으신 거예요. 그때 당연히 쓰시라고 했죠. 근데 저도 살짝 불편했어요. 남성 기사분이셨거든요. 이게 한두 번이 아니고 매일 일상적으로 이렇게 내가 화장실에 가도 되겠느냐 부탁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도 했었고요."
- 그건 남의 집 가면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나요?
"그렇죠. 근데 여러 가지로 불편한 상황이 많죠. 왜냐하면 집안에 저 여자 혼자 있었고 그 기사님은 또 남성분이셨고 화장실을 쓴다고 이야기하기가 죄송하셨을 거예요. 근데, 당장 급한데 어떡하겠어요. 얘기는 해야죠. 근데 이분들의 일터는 고객 집일 텐데 매번 그렇게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 상황을 상상했을 때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했어요. 공통적으로 겪는 화장실 문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 PD님은 화장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저도 화장실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처음이에요. 그데 공부하면 할수록 나도 화장실이 큰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저도 되게 과민성 대장이 있거든요. 그래서 어딜 가든지 화장실이 어디에 있고 그 화장실이 깨끗한지가 정말 중요한 사람이에요. 장거리를 가면, 화장실 먼저 다녀오고 배 아플까 봐 약도 엄청 많이 먹는 사람이거든요. 생각해 보면 저 어렸을 때도 똥 싼다는 놀림을 받을까 봐 학교에서 화장실 못 갔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제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도 되게 화장실이 정말 중요한 일부분이었는데 그걸 인지 못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 이번에 취재하면서 새롭게 안 거나, 생각이 달라진 게 있나요?
"제가 처음에는 지금 한국에서 화장실 못 가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 다루겠다고 얘기 드렸잖아요. 그래서 누가 못 가는지 생각해 봤는데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라고 하시는 분들은 다 화장실을 제대로 못 가고 계셨어요. 화장실이 인권의 바로미터이지 않나 생각했어요. 때문에 화장실은 개인적이지만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생각했었어요."
-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큰 변기를 놓고 화장실에 고민 말하게 하셨잖아요. 어떤 의도일까요?
"일단 유치원부터 다뤘었어요. 처음에 보시면 배변 교육하는 아기들도 나오잖아요. 공부하다 보니까 화장실에 제대로 가는 게 한 사람의 독립된 자아감과 자율성, 그리고 사회 관계성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외부의 화장실을 문제없이 갈 수 있는 것이 한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 성장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사회로 가는 첫 과정이 어딜까 생각했더니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학교에 와서 경험해 본 화장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서 일단 학교에 갔었고요.
두 번째는 이 화장실 문제가 그냥 일부분의 문제가 아니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지금 큰 고민거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요. 세 번째 더럽고 어두운 얘기일 것 같다는 우려가 많았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의 귀여운 고민을 들으면서 프로그램의 톤을 좀 밝게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그렇게 해서 화장실을 초등학교에 갔었고요."
- 같은 초등학교라도 성별이나 학년에 따라 화장실에 대한 생각이 다른가 봐요.
"저학년 친구들은 일단 공중화장실이 낯설고 변기가 커서 화장실 가는 게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대다수였다면 큰 애들은 이렇게 몸이 성장하니까 그런 문제들은 없었어요. 그것보다 여자애들 경우 불법 촬영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되게 많았고요. 화장실이 더럽다거나 청소가 잘 안되어있을 때 불편하다는 얘기도 많았습니다. 근데 학년과 상관없이 가장 많았던 건 똥 싸는 데 놀려서 못 가겠다거나 똥 싸고 왜 물을 안 내리는지 모르겠다는 게 많았어요."
- 성인도 일하다 보면 화장실 가는 게 쉽지 않나 봐요.
"저희가 실험 세트 만들어 놓고 일반 성인들 초대해서 촬영했었잖아요. 그분들은 되게 다양한 각자만의 화장실 고민이 있는 분들이었어요. 군대에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서 못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70대 여성분은 공중화장실이 별로 없었던 시절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고 또 크론병을 앓고 계시는 분은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야 되기 때문에 친구들과 멀리 여행 간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시기도 해요. 되게 다양한 고민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사실은 일하다가 너무 바빠서 혹은 대체자가 없어서 아니면 상사가 눈치를 줘서 위계적인 조직 문화 때문에 못 가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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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싸느냐, 참느냐 화장실 전쟁' 편이 방송됐다. 이날 방송에서는 많은 이유로 화장실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담았다. 취재 이야기가 궁금해 지난 17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EBS 사옥에서 해당 다큐 연출한 박혜민 PD를 만났다. 다음은 박 PD와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화장실 이야기, 얼마나 힘들까"

- 화장실에 대한 취재는 어떻게 하게 되었어요?
"여러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제가 <다큐 프라임>의 아이템 선정할 시기 저희 집에 에어컨 설치 기사님이 에어컨 수리하러 오셔서 1시간 정도를 수리하고 가셨어요. 수리하던 도중 저에게 화장실 좀 써도 되겠느냐고 얘기하셨어요. 근데 그때 그 표정이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무 비굴한 표정 지으신 거예요. 그때 당연히 쓰시라고 했죠. 근데 저도 살짝 불편했어요. 남성 기사분이셨거든요. 이게 한두 번이 아니고 매일 일상적으로 이렇게 내가 화장실에 가도 되겠느냐 부탁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도 했었고요."
- 그건 남의 집 가면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나요?
"그렇죠. 근데 여러 가지로 불편한 상황이 많죠. 왜냐하면 집안에 저 여자 혼자 있었고 그 기사님은 또 남성분이셨고 화장실을 쓴다고 이야기하기가 죄송하셨을 거예요. 근데, 당장 급한데 어떡하겠어요. 얘기는 해야죠. 근데 이분들의 일터는 고객 집일 텐데 매번 그렇게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 상황을 상상했을 때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했어요. 공통적으로 겪는 화장실 문제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 PD님은 화장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저도 화장실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처음이에요. 그데 공부하면 할수록 나도 화장실이 큰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저도 되게 과민성 대장이 있거든요. 그래서 어딜 가든지 화장실이 어디에 있고 그 화장실이 깨끗한지가 정말 중요한 사람이에요. 장거리를 가면, 화장실 먼저 다녀오고 배 아플까 봐 약도 엄청 많이 먹는 사람이거든요. 생각해 보면 저 어렸을 때도 똥 싼다는 놀림을 받을까 봐 학교에서 화장실 못 갔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제가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도 되게 화장실이 정말 중요한 일부분이었는데 그걸 인지 못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 이번에 취재하면서 새롭게 안 거나, 생각이 달라진 게 있나요?
"제가 처음에는 지금 한국에서 화장실 못 가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 다루겠다고 얘기 드렸잖아요. 그래서 누가 못 가는지 생각해 봤는데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라고 하시는 분들은 다 화장실을 제대로 못 가고 계셨어요. 화장실이 인권의 바로미터이지 않나 생각했어요. 때문에 화장실은 개인적이지만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생각했었어요."
-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 큰 변기를 놓고 화장실에 고민 말하게 하셨잖아요. 어떤 의도일까요?
"일단 유치원부터 다뤘었어요. 처음에 보시면 배변 교육하는 아기들도 나오잖아요. 공부하다 보니까 화장실에 제대로 가는 게 한 사람의 독립된 자아감과 자율성, 그리고 사회 관계성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외부의 화장실을 문제없이 갈 수 있는 것이 한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 성장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이 사회로 가는 첫 과정이 어딜까 생각했더니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학교에 와서 경험해 본 화장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서 일단 학교에 갔었고요.
두 번째는 이 화장실 문제가 그냥 일부분의 문제가 아니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지금 큰 고민거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요. 세 번째 더럽고 어두운 얘기일 것 같다는 우려가 많았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의 귀여운 고민을 들으면서 프로그램의 톤을 좀 밝게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그렇게 해서 화장실을 초등학교에 갔었고요."
- 같은 초등학교라도 성별이나 학년에 따라 화장실에 대한 생각이 다른가 봐요.
"저학년 친구들은 일단 공중화장실이 낯설고 변기가 커서 화장실 가는 게 불편하다는 이야기가 대다수였다면 큰 애들은 이렇게 몸이 성장하니까 그런 문제들은 없었어요. 그것보다 여자애들 경우 불법 촬영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되게 많았고요. 화장실이 더럽다거나 청소가 잘 안되어있을 때 불편하다는 얘기도 많았습니다. 근데 학년과 상관없이 가장 많았던 건 똥 싸는 데 놀려서 못 가겠다거나 똥 싸고 왜 물을 안 내리는지 모르겠다는 게 많았어요."
- 성인도 일하다 보면 화장실 가는 게 쉽지 않나 봐요.
"저희가 실험 세트 만들어 놓고 일반 성인들 초대해서 촬영했었잖아요. 그분들은 되게 다양한 각자만의 화장실 고민이 있는 분들이었어요. 군대에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서 못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70대 여성분은 공중화장실이 별로 없었던 시절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고 또 크론병을 앓고 계시는 분은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야 되기 때문에 친구들과 멀리 여행 간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시기도 해요. 되게 다양한 고민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사실은 일하다가 너무 바빠서 혹은 대체자가 없어서 아니면 상사가 눈치를 줘서 위계적인 조직 문화 때문에 못 가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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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25 문학비에 담긴 시혼
우리 땅 곳곳에 문인들의 시비가 서 있다. 문인이 작고하면 동료나 후배들이 생전의 연고지에 시비를 세우고 대표 작품을 돌에 새긴다. 기념사업회가 맡기도 한다. 시비는 문화유산이 되거나 관광명소로 떠오르기도 한다. 여기서는 시인 몇 분의 시비를 소개한다.
청마 유치환 '깃발'
부산시 서구 하단동 에덴공원에 1974년 1월 청마를 기리는 사람들이 세웠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깃발'이 새겨졌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김수영 '풀이 눕는다'
김수영의 시비는 서울 도봉구 도봉동 131번지에 그의 1주기인 1969년 6월 15일 김수영 시비건립위원회가 세웠다. 시비에는 대표작 '풀'의 2연이 새겨졌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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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 '깃발'
부산시 서구 하단동 에덴공원에 1974년 1월 청마를 기리는 사람들이 세웠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깃발'이 새겨졌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김수영 '풀이 눕는다'
김수영의 시비는 서울 도봉구 도봉동 131번지에 그의 1주기인 1969년 6월 15일 김수영 시비건립위원회가 세웠다. 시비에는 대표작 '풀'의 2연이 새겨졌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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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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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25 31세 시의원 "광주 여성특구는 정치보복성 컷오프"... 차몰고 서울로 향해

더불어민주당 광주광역시당이 광역의원(시의원) 선거구 20곳 가운데 4곳을 내년 6·3 지방선거에서 여성 후보들만 경쟁할 수 있는 전용 선거구(여성특구)로 지정하는 안건을 의결한 데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시당 의사결정 회의 과정에서 "원칙 없는 지정"을 문제 삼는 강한 반발이 제기된 사실이 드러난 데 이어, 실제로 여성특구 지정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현역 31세 청년 시의원이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하며 공개 반발에 나섰다.
이명노(서구3) 광주시의원은 21일 오후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 광주시당 운영위원회의 잘못된 결정을 최고위원회에서 바로잡아 달라"고 촉구했다.
"억울한 컷오프 없애겠다는 정청래 대표 선언, 광주서 무너질 위기"
이 의원은 "바로 어제(20일 오후), 민주당 광주시당 운영위원회는 남구2, 서구3, 북구3, 광산5 선거구를 여성특구로 지정하는 안건을 통과시키고 최고위원회 의결을 앞두고 있다"며 "억울한 컷오프를 없애겠다는 정청래 대표의 선언과 당원들의 열망이 무너질 위기"라고 주장했다.
여성특구는 특정 선거구에서 여성 후보 간 경쟁을 전제로 설계되는 방식으로, 남성 후보 진입이 제한된다는 점에서 선거철마다 '역차별' 논란이 반복돼 왔다. 당헌·당규에 명시적 규정은 없으나 민주당은 여성 정치인 진입 문턱을 낮추겠다며 광주에서만 제6회 지방선거부터 운영하고 있다.
이 의원은 "광주시당은 아직 선출직 평가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원칙과 기준 없이 특구를 지정했다"며 "광산 4선거구의 경우 여성특구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언론 보도로 논란이 일자 하루 만에 광산 5선거구로 바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작금의 광주 민주당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제 지역구인) 서구 3선거구는 특구로 지정할 수 있는 합당한 명분이 없으며, 이는 오직 총선 경선에서 자신을 돕지 않은 저를 찍어 내리는 보복성 컷오프"라며 "이는 또한 참정권 확대라는 특구 지정의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했다.
전체 4곳 중 민형배·양부남 지역위, 반발 표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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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25 명줄 기댄 공간, 그들이 불탄 집터에서 지켜낸 것
유난한 빗줄기가 남녘 산하를 흠뻑 적시던, 정유(1597)년 5월(음력)이다. 비는 멎을 줄 몰랐고,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흐릿했다. 그 빗속을 한 무리 사내들이 걷고 있었다. 벼슬이 벗겨지고, 홑 벌 백의만을 걸친 채 산 넘고 강을 건너야 하는 길이다.
그들의 걸음은 결코 가볍지 못했다. 발자국마다 백성의 삶이 걸렸기 때문이다. 천혜의 관문이라는 구례 석주관을 지날 때 질척이는 흙이 발목에 감아 돌았다. 섬진강 옆 악양 들판도 붉은 흙탕물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비는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쏟아졌다. 칼바람에 강토가 짓뭉개졌고, 백성들 눈빛은 간단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뭇 생명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왕보다, 그가 한 줄기 빛이었다. 벼슬은 거둬갈 수 있을지언정, 충의까지는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게 왕의 얄팍한 능력이었다. 백의 한 벌에 의지해 빗길을 걷는 당위도 그런 의기와 결기에서 말미암았다. 같은 달 28일 하동읍성에 이르자 현감 신진이 그를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곳곳이 허물어진 읍성 남문 밖으로, 이순신의 소식을 들은 가녀린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 버짐처럼 두려움이 내려앉았지만, 눈빛만은 따스함을 잃지 않았다. 차갑고도 매서운 전란의 칼날에도, 이 고장엔 아직 인의(仁義)가 살아있었다. 그들의 정성은 말보다 깊었고, 손길은 빗물보다 정갈했다. 요란한 빗소리에도 장군은 그들의 마음을 능히 읽어낼 수 있었다.
비 내리는 깊은 밤, 등잔불이 나라처럼 마구 흔들렸다. 세찬 빗방울이 흙담에 부딪히고 얇은 창호엔 투두둑, 얄궂은 물무늬를 아로새겼다. 흔들리는 등불에 지난 전쟁의 처참함이 잔영처럼 되살아났다. 노를 저어준 격군들, 싸움터에서 스러져 간 병사들 얼굴이 방금인 듯 다가들었다. 수천 마디 상찬이, 백성 한명의 목숨을 능가할 순 없다. 승리보다 먼저 지켜야 할 건 백성임을 뼈에 새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나라는 백성의 땀과 눈물로 세워지고 지켜진다는 것을.
이튿날, 다시 길을 나선다. 세찬 빗줄기에도 그의 발걸음엔 더욱 힘이 붙었다. 하동 백성이 보여준 따스한 온기가 축축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백성을 거슬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신념이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지탱시켜 주었다. 그 믿음이 몇 달 후 명량에서 바다를 구하고, 나라를 구한 바탕이 되었다.
금오산과 주교천의 읍성
지난 12월 중순 찾은 하동읍성은 섬진강 방어의 전초였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던 1417년, 태종이 남해안 연안을 따라 읍성을 축조하라 명한다. 왜구 방어의 적극적인 의지다. 하동도 그 명을 받는다. 여러 논의 끝에 고현의 양경산 자락이 성 터로 선정된다.
가야 때부터 소금 배가 드나든 주교천 배다리는 오랜 교역의 중심지다. 뱀처럼 구부러진 냇물이 넓진 않아도 평야를 끼고 있다. 남쪽에 앞세운 금오산 너머로 남해가 지척이고, 그 사이가 물살이 센 노량이다.
왜구에 시달린 백성들이 흙을 파내고 돌을 나른다. 비탈을 괭이가 깎아내고, 돌마다 정과 망치가 땀을 튀긴다. 첫 성의 둘레는 309m, 높이 4m였다. 작지만 단단한 산성형 읍성이다. 성 안에 관아와 객사, 창고가 세워지고 산성 여럿이 한 줄기 봉화로 연결된다. 금오산은 성의 파수꾼이었고, 주교천은 세상으로 열린 길이었다.
세월이 흘러 성이 넓혀진다. <문종실록>은 둘레 900m, 높이 3~5m라 기록하고 있다. 산자락 읍성이 관리의 공간이라면, 주교천 배다리는 교역의 중심이었다. 물길 따라 소금과 곡식, 군량이 오간다. 주성마을이 북적거리는 시장으로 한 시대를 구가한다. 주교천 물길이 바쁘게 섬진강에 닿아 노량으로 흘렀다. 지리산 연봉에 산성을 두어 읍성을 호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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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걸음은 결코 가볍지 못했다. 발자국마다 백성의 삶이 걸렸기 때문이다. 천혜의 관문이라는 구례 석주관을 지날 때 질척이는 흙이 발목에 감아 돌았다. 섬진강 옆 악양 들판도 붉은 흙탕물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비는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쏟아졌다. 칼바람에 강토가 짓뭉개졌고, 백성들 눈빛은 간단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뭇 생명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왕보다, 그가 한 줄기 빛이었다. 벼슬은 거둬갈 수 있을지언정, 충의까지는 앗아갈 수 없었다. 그게 왕의 얄팍한 능력이었다. 백의 한 벌에 의지해 빗길을 걷는 당위도 그런 의기와 결기에서 말미암았다. 같은 달 28일 하동읍성에 이르자 현감 신진이 그를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곳곳이 허물어진 읍성 남문 밖으로, 이순신의 소식을 들은 가녀린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얼굴에 버짐처럼 두려움이 내려앉았지만, 눈빛만은 따스함을 잃지 않았다. 차갑고도 매서운 전란의 칼날에도, 이 고장엔 아직 인의(仁義)가 살아있었다. 그들의 정성은 말보다 깊었고, 손길은 빗물보다 정갈했다. 요란한 빗소리에도 장군은 그들의 마음을 능히 읽어낼 수 있었다.
비 내리는 깊은 밤, 등잔불이 나라처럼 마구 흔들렸다. 세찬 빗방울이 흙담에 부딪히고 얇은 창호엔 투두둑, 얄궂은 물무늬를 아로새겼다. 흔들리는 등불에 지난 전쟁의 처참함이 잔영처럼 되살아났다. 노를 저어준 격군들, 싸움터에서 스러져 간 병사들 얼굴이 방금인 듯 다가들었다. 수천 마디 상찬이, 백성 한명의 목숨을 능가할 순 없다. 승리보다 먼저 지켜야 할 건 백성임을 뼈에 새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나라는 백성의 땀과 눈물로 세워지고 지켜진다는 것을.

이튿날, 다시 길을 나선다. 세찬 빗줄기에도 그의 발걸음엔 더욱 힘이 붙었다. 하동 백성이 보여준 따스한 온기가 축축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백성을 거슬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신념이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지탱시켜 주었다. 그 믿음이 몇 달 후 명량에서 바다를 구하고, 나라를 구한 바탕이 되었다.
금오산과 주교천의 읍성
지난 12월 중순 찾은 하동읍성은 섬진강 방어의 전초였다.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던 1417년, 태종이 남해안 연안을 따라 읍성을 축조하라 명한다. 왜구 방어의 적극적인 의지다. 하동도 그 명을 받는다. 여러 논의 끝에 고현의 양경산 자락이 성 터로 선정된다.

가야 때부터 소금 배가 드나든 주교천 배다리는 오랜 교역의 중심지다. 뱀처럼 구부러진 냇물이 넓진 않아도 평야를 끼고 있다. 남쪽에 앞세운 금오산 너머로 남해가 지척이고, 그 사이가 물살이 센 노량이다.
왜구에 시달린 백성들이 흙을 파내고 돌을 나른다. 비탈을 괭이가 깎아내고, 돌마다 정과 망치가 땀을 튀긴다. 첫 성의 둘레는 309m, 높이 4m였다. 작지만 단단한 산성형 읍성이다. 성 안에 관아와 객사, 창고가 세워지고 산성 여럿이 한 줄기 봉화로 연결된다. 금오산은 성의 파수꾼이었고, 주교천은 세상으로 열린 길이었다.

세월이 흘러 성이 넓혀진다. <문종실록>은 둘레 900m, 높이 3~5m라 기록하고 있다. 산자락 읍성이 관리의 공간이라면, 주교천 배다리는 교역의 중심이었다. 물길 따라 소금과 곡식, 군량이 오간다. 주성마을이 북적거리는 시장으로 한 시대를 구가한다. 주교천 물길이 바쁘게 섬진강에 닿아 노량으로 흘렀다. 지리산 연봉에 산성을 두어 읍성을 호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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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25 일본의 부당한 요구 이어지자, 학교 이사장이 내린 결단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공립학교가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 3년 전인 1916년에 30세가 된 몽양 여운형이 상하이의 한국인 아동들을 위해 설립한 인성학교(人成學校)가 그 기초가 됐다.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2012년 제9집에 실린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논문 '상해 인성학교 유지운동과 폐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교민단이 인성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면서 인성학교는 공립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갔다"고 말한다.
이 학교가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처했을 때 이곳을 이끈 인물이 여운형보다 한 살 많은 서병호(1885~1972)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고 평양 대성학교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14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서병호가 그 시점의 인성학교 이사장이다.
일본의 요구 거부하고 무기한 휴교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1932년 이후로 항저우-친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이동한 것은 그해에 일본군이 일으킨 상하이사변을 계기로 이 도시가 일본군의 영향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상하이 인성학교가 비극적 상황에 처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48세 때인 1933년에 이 학교 이사장이 된 서병호는 1935년에 일제강점기판 국정교과서 사태에 직면했다. 위 논문은 "1935년 10월 일본총영사관은 인성학교에 대해 같은 해 11월 10일부터 일본 국정교과서에 의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라고 강요하였다"고 설명한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 서병호 편은 "일본이 일장기 게양을 강요"하기까지 했다고 알려준다.
그 상황에서 서병호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고 무기한 휴교를 선택했다. 그해 11월 11일의 일이다. 그와 함께 선우혁(1883~1985) 교장과 교직원 전체도 사직을 택했다. 이 학교는 일제 패망 뒤인 1947년 3월 1일 다시 문을 열었다.
인성학교 역사에 등장하는 여운형·서병호·선우혁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3·1운동 한 달 전인 1919년 2월 1일 파리 평화회의 한국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해 국제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신한청년당 창립 발기인의 일부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지한 리더십은 30대 때 용감하게 벌인 이 사건에 토대를 뒀다. 서병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해 4월 13일 김구·신익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에 들어가 내무위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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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25 "동짓날 밤, '동지'가 됐다"... 다시 모인 '남태령 시민들'


"어디서도 따뜻하게 손 잡아주는 사람이 많이 없었던 우리 농민들에게는 죽어도 잊지 못할 감동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7시 정도 됐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저에게 한 분이 오셔서 '아저씨 왜 이리 막혀있어요?'라고 물어보셔서 제가 그랬습니다. 저희들은 경찰 차벽에 막혀서 꼼짝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 '그러면 안 되잖아요. 제가 함께 해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듣고 저는 돌아서서 한참 울었습니다. 저 잘 안 울게 생겼죠? 잘 웁니다. 남태령 얘기만 하면...
- 전주환(경상남도 진주시 농민)
한 해 중 가장 긴 겨울밤, 동짓날에 '동지(同志)'가 된 사람들이 1년 만에 다시 모여 팥죽을 나눠먹었다. 2024년 12월 21일, 남태령 고개에서 서로를 만난 농민과 시민들이다. 전직 대통령 윤석열씨의 퇴진을 요구하며 트랙터를 끌고 상경한 농민단체 연합체 '전봉준 투쟁단'을 가로막았던 경찰 차벽 앞에서, 밤새 연대하며 길을 열어냈던 이들이 1년 전의 기억을 다시 꺼냈다. 21일 전봉준투쟁단·남태령 책모임 등이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남태령 첫돌' 행사를 열었다.
남태령 얘기만 하면 '울보'가 되는 농민, 남태령 이후 '광장 매니아'가 된 청년 기수, 당시 사람들이 올린 SNS 글을 아카이빙해오고 있는 사회운동 연구자까지. <오마이뉴스>는 행사에 참여해 여전히 남태령의 시간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팥죽 나누며 떠올린 그날 밤... "'뒤로가기' 있어도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믿음 생겨"
시민과 농민 100여 명이 팥죽을 나눠 먹은 통인동 효자아파트의 풍경은 1년 전 후원 물품과 배달 음식이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남태령 고개를 떠올리게 했다. 농민들이 준비해 온 팥죽과 고구마, 동치미를 행사 스태프들이 부지런히 나르자, 참가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의자를 식탁 삼아 음식을 나누고 떠먹여주며 서로를 챙겼다. 배경음악으로는 익숙한 민중가요가 흘러나왔고, 벽 한쪽 크리스마스 LED 조명으로 장식된 나무통에는 광장에서 휘날렸던 깃발들이 꽂혀 있었다. 지난 겨울 광장을 수놓았던 '윤석열 파면' 피켓도 벽과 기둥 곳곳에 붙여있었다.
팥죽을 나눠먹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1년 전 그날을 회상했다. "동치미가 끝내준다"고 감탄하던 김소현(여, 30)씨는 "벌써 1년이 지난 게 믿기지 않는다"며 "그날 새벽에 진짜 추웠는데 그래도 지금 웃으면서 따뜻한 공간에서 보니 좋다"고 말하며 웃었다. 옆에서 팥죽을 떠먹던 장인선(남, 32)씨 역시 "그때도 쏟아진 밥차, 간식차 덕분에 잔뜩 맛있게 얻어먹었는데 지금 여기도 또 맛있는 게 있네"라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이들에게 1년 전 남태령은 쉽게 잊히지 않는 순간이다. 당시 남태령에 있었던 김여진(여, 24)씨는 "차벽이 열리고 전농 선생님들을 배웅할 때 저희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어주셨는데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고 생생하다"며 "엄청 춥고 힘든 밤을 보냈음에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남태령 이전까지는 세상에 비관적이었는데, 그날 연대를 체감하면서 '뒤로가기'가 잠시 있을지언정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단결투쟁' 머리띠를 두른 게임 캐릭터 키링을 가방에 단 황민수(남, 39)씨는 남태령의 밤을 집에서 지켜봐야 했던 기억을 꺼냈다. 그는 "막차가 끊겨 현장에 갈 수 없었는데, 서 있기조차 힘든 추운 날에 사람들이 떠는 모습을 유튜브로 보며 큰 부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황씨는 "다음 날 아침 첫차를 타고 남태령으로 가서 결합했는데, 끝내 경찰 차벽이 열리면서 햇살이 비치고, 그 사이로 트랙터가 지나가던 장면이 감동적이었다"며 "직접 본 사람이라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상했다.
광화문 집회를 마치고 곧바로 남태령으로 향했다는 김동건(남, 24)씨는 "평생 마주칠 일 없을 것 같던 농민들과 만나 민중가요 가사를 한줄씩 배우고, 반대로 청년들은 K팝을 알려주며 서로를 알아갔던 시간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는 "남태령을 다녀오고 나서 내 삶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자들이 함께 모여 강해지는 걸 보며 현장에서 연대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그 이후 작은 집회들도 참가하고 있다"며 "그날의 다짐을 이어가고 잊지 않기 위해 오늘도 이 자리에 왔다"고 전했다.
"각본 없는 드라마, 응원봉과 함께하는 농민운동 그릴 것"…농민들이 기억하는 남태령


농민들에게도 남태령은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경북 청송에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김태현(남·62)씨는 남태령을 "각본 없는 드라마"에 비유했다. 그는 "농민운동을 35년째 해오면서 트랙터가 막힐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남태령에서 벌어진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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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25 안병진 "극우의 '영성' 추구, 무시할 수 없는 흐름"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가 17일 공존의뜰(대표 조희연) 송년회 강연에서 "미국에서 극우의 부상은 기술과 종교, 남성성과 백인 민족주의가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복고적 기술주의'가 정치 공간을 점령한 결과"라며 "이를 방치할 경우 미국과 한반도 민주주의 전체가 '디스토피아적 세상'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트럼프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실리콘밸리 우파 엘리트와 극우 기독교 네트워크, 그리고 이를 키워낸 미국 민주당·진보 진영의 오판을 함께 짚으며, "한국 사회가 '법과 질서·지구 시민성'을 아우르는 새로운 공화주의 교육과 국제 연대를 준비하지 않으면 같은 파고를 피하기 어렵다"라고 강조했다.
안 교수는 강연의 출발점으로 한미 정상회담 직전 트럼프 당시 대통령의 '숙청' 발언을 소환하며 "그때는 잠깐의 소란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새로운 시대의 예고편이었다"라고 규정했다. 트럼프가 내뱉은 이 언어가 일회적 막말이 아니라, 극우 기독교 국가주의와 결합한 '극우 인터내셔널'의 상상력을 드러낸 신호였다는 것이다. 그는 "밴스 부통령과 같은 인물들이 전 세계적 기독교 국가를 꿈꾸고 있다"라고 지목했다.
안 교수는 미국 극우의 현재를 '복고적 기술주의'라는 키워드로 설명했다. 캘리포니아 '테슬라 다이너'에서 복고풍 주크박스와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가 한 공간을 공유하는 풍경을 예로 들며 "과거의 향수와 최첨단 기술이 결합된 복고적 기술주의가 오늘날 미국 우파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터 틸, 일론 머스크, 카프 등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기술을 종교처럼 숭배하는 우파 엘리트'로, 기독교 국가·가부장제·초엘리트주의를 동시에 밀어붙이는 '중세적 사상'의 보유자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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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025 "민주당 아닌 나랑 싸워" 장동혁 저격한 한동훈, "도토리" 외친 지지자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21일 자신과 친한계 인사를 향한 장동혁 대표와 당의 찍어내기 시도를 공개 비판했다. 특히 윤어게인(YOON AGAIN, 윤석열 정신 계승) 세력을 질타하고, 12.3 비상계엄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를 전하는 등 지지층 결집 행보에 나섰다.
한 전 대표는 21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토크콘서트를 열었다. 이날 토크콘서트엔 1500여명의 중·장년 여성 지지자들이 자리를 가득 채웠다. 또 김예지·박정훈·배현진·안상훈·유용원·정성국·진종오 국민의힘 의원과 김연주·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 등 친한계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한동훈 "나는 '들이받는 소' 같은 공직자"... 친한계 찍어내기 반박
무대에 오른 한 전 대표는 인사말에서 "제가 더불어민주당과 싸울 때, 민주당이 아니라 민주당과 싸우고 있는 저랑 싸워서 정치적 탈출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더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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