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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기]광주동성고, '디펜딩 챔피언' 유신고 15대9로 누르고 결승행
2018년 전국고교야구선수권자인 광주동성고가 장단 29안타를 주고받는 화끈한 타격전을 벌인 끝에 결승에 진출했다. 광주동성고는 8일 서울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제75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조선일보·스포츠조선·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공동 주최) 준결승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수원 유신고를 15대9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광주동성고는 10일 결승전에서 장충고를 상대로 2년 만에 다시 우승을 노린다. 광주동성고의 방망이는 경기 시작과 함께 불을 뿜었다. 1회초 선두 타자 김도영(2학년·유격수)이 ...
코로나 시대 집콕 생활이 갑갑하여 요즘은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를 자주 나간다. 드라이브 길은 개인적으로 급한 용무가 아니면 자동차 전용도로나 산업도로는 이용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주변 풍광이 아름다운 일반국도나 해안 도로를 많이 선호한다. 왜냐하면 사람 사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고 먹거리도 많아, 골라 먹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가 직접 해주던 콩국수의 맛
 
국도로 가다 보면 도로변에 여름철에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이 있다. 바로 콩국수 개시를 알리는 깃발이다. 콩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노란 바탕에 빨간 글씨로 콩국수라고 적혀 있어 정감이 간다.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이 앞을 지나면 옛날 집에서 엄마가 직접 해주던 콩국수가 생각나서 가던 길을 잠시 멈추게 된다.
 
여름 보양식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삼계탕, 보신탕 등이 있다. 삼복더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음식이다. 그러나 이런 동물성 외에 식물성으로 서민들이 많이 찾는 대표적인 보양식이 바로 콩국수이다.
 
요즘은 시내 곳곳에 콩국수를 맛있게 만들어 예쁜 고명까지 얻어 선보이는 집들이 많다. 그러나 내가 자주 찾아가는 곳은 복잡한 시가지가 아닌 외곽지 조용한 시골마을 국숫집이다. 일반국도 4호선을 따라 영천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경주 건천읍 모량리 도로변에 있는 조그마한 콩국수 집이다.

사시사철 칼국수만 전문으로 하는 집이다. 거기다 국산 콩으로 집에서 만든 손두부도 판매한다. 칼국수를 먹고 나오면 두부를 만들고 남은 부산물인 콩비지를 출입문 앞에 두고 필요한 사람은 가져 가라고 한다. 여름철에는 손두부를 소량만 만들다 보니 늦게 가면 완판이라 구입할 수가 없다.
 

콩국수는 국산콩 특유의 고소함에 엄마의 손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맛이다. 고명은 오이를 채 썰고 거기다 깨소금 약간 뿌린 것뿐이다. 콩국수 집에 흔히 올라오는 삶은 계란이나 토마토 등은 없다. 그런데도 여기 콩국수는 다른 집과는 다른, 옛날 생각이 저절로 나는 특별한 맛이다.
 
반찬은 콩국수와 함께 나오는 겉절이 김치와 된장에 묻힌 고추, 간장과 식초, 설탕을 넣어 절인 무, 세 가지뿐이다. 그런데도 옛날 엄마가 해준 콩국수 맛과 비슷해 자주 찾는 곳이다.
 
특별한 쫄깃함, 이 집의 비밀 노하우
 
대부분 음식점 주방은 청결을 위해 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한다. 바깥에서만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놓았다. 그래도 몇 번 들른 단골손님이라고 소독 후 주방 안으로 들어가 잠시 주인장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콩국수 만드는 법이야 어릴 적 어깨너머로 본 것도 있고, 일손이 모자랄 때 실제 할머니나 어머니를 직접 도와준 적도 있어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신문이나 방송 등에 콩국수와 관련한 레시피가 많기도 하다.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고소한 콩국수를 먹다 보면 이 집의 면이 특별히 쫄깃한 것 같아 비결을 물어보았다.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나 해서다. 예상한 답변대로다. '우리 집만의 특별한 노하우'라며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대신 반죽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제면기에 넣어 생면을 빼는 모습만 보여준다.
 
보통 가정에서는 생면을 반죽한 후 비닐 팩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일정 시간 숙성한 후 칼로 썬다. 그러나 이 집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증만 자아낼 뿐 알 수가 없다.
 
콩물도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았더니 상세히 일러준다. 콩은 삶을 때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한다. 너무 삶으면 메주콩 냄새가 나서 안 된다고 한다. 몇 분 동안 삶아야 된다는 법은 없지만, 삶다가 콩을 한번 씹어보고 고소한 맛이 나면 바로 꺼내 식혔다가 믹서기에 갈면 된다고 한다.
 
당일 아침에 삶아 냉장고에 1차로 갈아 넣어둔 콩물을 꺼내더니 다시 한 번 더 믹서기에 넣어 돌린다. 한참을 더 갈고 난 후 금방 삶은 생면에 부어 손님상에 내놓는다.
 
저녁 7시 식당 문 닫을 시간이 되어 팔고 남은 콩물이 있는 날이면 이튿날 사용하지 않고, 바로 손님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콩물은 하루 지나 잘못 관리하면 시큼한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가마솥에 콩을 삶아 맷돌에 한 숟갈씩 콩과 물을 번갈아 넣어가며 가는 게 일이었다. 목 넘김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맷돌로 간 콩물을 결이 촘촘한 삼베에 부어 두 손으로 쥐어짠 기억도 난다. 두 손으로 짜다 힘에 부치면 옆에 있던 삼촌들을 불러 두 명이 함께 콩물을 쥐어짜며 비틀기를 반복했다. 옛날 대가족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했던 때, 콩국수와 관련한 추억들이다.
 
한더위 복날이라고 핑계 대고 지인들과 어울려 닭, 장어 등 보양식을 먹으러 갔다가 술만 잔뜩 먹고 와서는 숙취로 고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몸보신하러 갔다가 몸을 건강하게 하기는커녕 혹사시키는 경우다.
 
그러나 콩국수는 술과는 거리가 멀어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 먹는 보양식으로 좋다. 아이들은 콩 특유의 비린 맛 때문에 먹기를 꺼려 하지만, 설탕 한 숟갈 듬뿍 넣어 저어주면 맛있게 잘 먹는다.
 
콩은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하고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국산 콩만을 고집하며 만든 콩국수 한 그릇이 7000원이다. 가격도 부담 없이 적당하다. 하계 휴가철을 맞아 아이들을 동반하고 단백질과 무기질이 풍부한 콩국수를 올여름 건강 보양식으로 추천하고 싶다.
남편과 드라이브하는 시간이 좋다. 달리는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면 마치 연애 시절로 돌아가 데이트 하는 기분이 든다. 이런 낭만적인 내 맘과 상관없이 남편은 드라이브할 때마다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앞차, 건너편 차, 좌우 옆 차에 관한 차종 분석이다.       

"저 차는 1억 2천이야. 나 저거 언제 사줄 거야?"
"어! 저 차는 신형인데 지난번 모델보다 별로다."
"와우~ 저거 들이받으면 우리 쪽박 차는 거야. 멀리 떨어져서 가야지."   
   

간만에 책 얘기, 철학 얘기하며 낭만 타령 좀 할까 싶은 나를 남편은 굳이 자본주의 세계로 갖다 앉힌다. 내가 볼 땐 다 그 차가 그 차 같은데 가격이 그렇게나 비싸다는 것에 한번 놀라고, 그걸 또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남편에게 두 번 놀란다. 남편이 쭉쭉 빠진 외제차를 부러워 할 때마다 나는 늘 엄마 얘기를 꺼낸다.      

"차는 그냥 굴러가면 돼. 우리 엄마 한번 봐봐, 아마 외제차를 준다 해도 지금 차랑 안 바꿀 걸? 엄마처럼 우리 차에 애정을 가져, 애정을!"     

남편은 속으로 '어우 또 장모님 얘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엄마의 차는 남들 시선을 엔진 삼아 달리는 수억 원의 고급 차보다 훨씬 값지다고.

54세 운전면허를 딴 엄마
 
 
우리 엄마의 진짜 독립은 아들딸 시집·장가 보낸 후가 아니라 운전면허를 따고 난 후부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던 곳은 하루에 버스가 다섯 번밖에 다니지 않는 오지 산골이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버스를 놓치면 집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늘 막차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했다. 아직도 마음이 불안한 날은 집에 가는 버스를 놓치는 꿈을 꾼다.

일찌감치 도시 여성의 삶을 선택한 나는 어디든 오갈 수 있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있지만, 엄마는 나이 50이 넘을 때까지 하루에 다섯 번 다니는 그 버스 하나에 의지하고 살아왔다.

아빠에게 차가 있었으나 경상도 남편 대부분이 그렇듯, 아내의 답답한 심정을 알아줄 리 없었다. 어디 가고 싶거나, 볼 일이 있다 해도 거의 나몰라라 식이었다. 아빠가 볼일이 있을 때 얻어 타고 나갔다 오는 것이 엄마의 유일한 시내 외출이었다. 그조차도 아빠 볼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일을 봐야 하니 늘 마음이 조급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선언했다. 면허 학원비가 80만 원. 단 돈 만 원도 벌벌하는 박 여사가 그 돈을 들여 면허를 딴다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설사 면허를 딴다고 한들 엄마가 운전대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 싶은 우려도 앞섰다. 엄마 나이 54세 때였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엄마의 운전면허 도전기는 의외로 순탄했다. 이론도 한 번에 패스, 실기도 한 번에 패스, 가족 모두 운전 체질이라며 엄마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엄마는 면허 시험을 단번에 합격했다. 운전면허를 취득한 그날은 지금도 엄마 인생에서 가장 잘한 날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나는 서울에서 일하다 가끔 고향집에 내려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빠가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어느 날은 기차역 앞, 익숙한 트럭 운전석에 아빠가 아닌 엄마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시골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파란색 트럭 포터. 차 창을 내리고 손을 흔드는 것은 분명 엄마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그 파란색 트럭이 유독 커보였다. 하지만 걸크러시, 아니 맘크러시답게 짐보따리를 트럭 짐칸에 '휙' 던지고, 나를 옆자리에 태워 액셀을 밟았다. 운전대를 잡은 의기양양한 엄마의 모습,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평균 시속 40~50km. 자동차 광고에 나오는 시승감, 속도감 이런 건 엄마에게 전혀 중요치 않았다. 속도가 뭣이 중하리. 이 차 타고 딸 마중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마트도 가고, 농작물도 '담푹담푹' 실으면 됐지.

내가 지금도 어려워 절절매는 주차도 엄마에겐 노 프라블럼! 시골의 널찍한 공터가 모두 엄마 전용 주차장이었다. 박 여사의 신명 나는 드라이브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동네 아줌마와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했다. 차를 몰고 읍내를 넘어 시내까지 나간 것이다. 난생처음 4차선을 달려 시장을 향했다고 한다. 장날에 일부러 맞춰 갔다는데 초보 운전자가 장날 인파와 주차난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엄마는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운전 잘하게 생긴 사람 붙잡고 주차 좀 해달라고 했제. 하하하."      

대리주차도 시골인심인가? 부탁받은 사람이 흔쾌히 오케이하고 아주 완벽하게 주차를 해줬다고 했다. 겁 없는 드라이빙 덕분에 엄마의 운전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이젠 무사고 운전경력 10년 차가 넘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엄마의 부릉부릉, 가족과 자신을 위해 달리는 소리

지금은 파란색 포터를 몰고 안 가는 데가 없고 못 가는 데가 없다. 친정에서 엄마가 안 보인다 싶으면 엄마의 트럭도 함께 없다. 손자 손녀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러 간다고 부릉, 딸내미 반찬거리 사러 간다고 부릉, 밭에 모종 하러 간다고 부릉, 엄마의 트럭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엄마, 좋은 차 하나 사주까?"
"더 좋은 차가 어딨노? 뒤에 짐도 맘껏 싣고, 내 가고 싶은데 다 갈 수 있고, 이 차보다 좋은 거 없다."    
  

역시 엄마다. 한평생 명품이 뭔지도, 브랜드 옷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우리 엄마.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계절마다 바뀌는 신상 풀이름도 알고, 산나물 핫플도 알고, 과실의 수확 공식도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남들이 좋다는 거 좀 하고 살라고 툴툴대면 엄마는 늘 이렇게 말한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 캐도 내가 좋아야 진짜배기지. 맞다. 남들이 뭐라든 엄마의 차는 엄마에게는 진짜배기 명품 차인 것이다.

주식을 시작한 지 올해로 1년 6개월째가 되었다. 요즘 유행하는 동학 개미 운동이 벌어지기 전부터 주식투자를 한 셈이다. 처음 주식에 입문한 계기는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윳돈이 좀 있는데, 은행 이자는 너무 낮고... 어디 투자할 만한 괜찮은 곳은 없을까, 하던 차에 누군가에게 주식투자를 권유받았다.

그의 친구가 아는 어떤 고수가 그랬는데, 지금 1900원인 어떤 종목이 5000원까지 오른다고 했다는 것이다. 양봉과 음봉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그 말 한마디를 듣고 가진 돈 1500만 원을 '쿨하게' 몰빵 했다(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지인의 친구의 아는 주식 고수의 말만 믿고 1500만 원을 때려 넣은 것이다. 아아 어리석은 인간이여... 아니, 어리석은 나여!).
 
5000원까지 오른다는 그 주식은 무슨 기사가 뜨면서 두 번 연속 상한가를 쳤다. 순식간에 3200원까지 올랐다. 나는 며칠 만에 1000만 원가량을 벌게 된 셈이었다. 주식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투자처였구나. 눈만 뜨면 얼른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아직 매도할 수는 없지. 왜? 이건 5000원이 될 거니까! 그 종목이 무사히 5000원이 되면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인생도 주식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하락, 하락, 하락
 
주가는 3600원을 찍고 그때부터 조금씩, 하지만 꾸준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그사이 몇 번이고 매도할 기회가 있었다. 적당히 익절(이익을 보고 매도하는 것)하고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를 거라는 부질없는 기대와 오르지 않는 주가 창을 보며 한숨짓는 날의 연속이었지만 끝끝내 주가가 1900원 아래로 갈 때까지 붙잡고 있었다.
 
결국 나는 1650원 즈음에 팔고 나왔다. 1000만 원을 벌었다가 몇백을 잃은 것이다. 그 이후로도 무슨 유료 리딩방(돈을 받고 주식 종목을 추천해주는 곳)을 기웃거리며 상한가 따라잡기 같은 걸 하다가 손실, 매수했던 바이오주가 임상에 실패하면서 손실을 거듭하며 단 3개월 만에 가진 재산 1500만 원 중 총 800만 원을 잃었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차트를 볼 줄 모른다는 것. 캔들(주가 차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는 것. 재무제표를 볼 줄 모른다는 것. 거래량이란 게 있는 줄도 몰랐다는 것. 쉽게 말해 돈을 1500만 원이나 태워놓고서 주식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던 거다.
 

그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주식 공부. 그때 정말 많은 주식 책을 읽었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하자면 <스스로 수익 내는 주식투자의 모든 것>이란 책이다. 이 책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운용법이나 매매기법 분할매수, 분할매도 등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 책에 나와 있는 손실의 유형에 100% 해당했기 때문이다.

'누가 얼마까지 간다고 해서 믿고 샀다가 손실' 
- 나다.
 
'정체 모를 리딩방에 들어갔다가 손실'
- 역시 나다.
 

책에는 이런 말도 있다.

'주식으로 수익 내기 위해선, 스스로 종목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 몰랐다.
 
'쫄보가 되어야 합니다. 주식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무서운 건지 알아야 합니다.
제발 조심조심 주식 하십시오.'
- 조심... 그게 뭐지?
 
'주식으로 일확천금 노리지 마십시오.'
- 노렸다.
 

주식도 공부다 

그렇게 본전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필기를 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주식도 아는 만큼 보인다. 그렇게 나는 주식 시장의 수상한 질서를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 수업료가 800만 원짜리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주식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관점과 마인드가 약간 바뀌긴 했다. 뉴스를 보고, 고수의 강의를 듣긴 하지만, 종목은 스스로 찾는다. 거래량과 재무제표를 본다. 말마따나 차트는 세력이 장난칠 수 있지만 거래량과 재무제표는 그렇게 못한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고점에서 사지 않고 아래에 걸어둔다. 안 사지면 말고의 마인드로 가능한 그 날의 가장 낮은 가격으로 매수하려고 한다.

이미 상승한 종목은 노리지 않는다. 실적이 좋지만 아래에서 천천히 기어가고 있는 녀석들을 신중하게 찾아서 조금씩 모아간다. 몰빵하지 않는다. 주식을 하되 온종일 주가 창만 살펴보지 않는다. 나의 일상을 살아간다. 무엇보다 이제 주식으로 한몫 잡아보겠다는 생각이 없다. 그러니 주가가 조금 빠져도 예전처럼 안절부절하지 않을 수 있다.
 
아직 손실을 모두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제는 잃지는 않을 수 있겠다는 자신이 조금 생겼다. 하루하루를 보면 마이너스인 날도 있지만 달로 보면 50만 원 벌 때도 있고, 30만 원 벌 때도 있다. 적어도 괜찮으니까 꾸준히 수익만 난다면 그것으로 오케이. 30만 원씩 매달 벌면 일 년이면 360만 원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나의 전체 주식 인생이 빨간불이 되는 날도 올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에 특히 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에 뛰어들었다. 밀레니얼 세대가 주식 등으로 '돈을 버는 법'을 공부하는 게 유행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은행 이자는 제로에 가깝고, 경기는 침체를 거듭하고 있는 와중에 주식을 비롯한 재테크에 눈을 돌라는 것은 소위 개미들의 거의 유일한 선택지인지도 모른다.

내가 뭘 잘 알아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고, 먼저 실패해본 사람으로서 얘기하자면 공부 많이 하시고, 철저히 준비하셨으면 좋겠다.
 
처음엔 분명 은행이자보다 조금 더 수익 내보자고 시작한 주식이었다. 그런데 은행 이자만큼의 수익은커녕 힘들게 모은 피, 땀, 눈물 같은 월급이 반 토막 나 있는 그 심정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결혼을 약속한 여인과 헤어져도 나오지 않던 피눈물을 주식 통장 보면서 흘렸다.

앞에서 언급한 책이 아니더라도 시중에 좋은 책은 많다. 요즘엔 괜찮은 유튜브 채널도 많아서 굳이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기본적인 것은 쉽게 배울 수 있다. 다만 나는 종목을 추천해주는 곳은 믿지 않는다. 판단은 스스로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선 판단도 못 할 테니 괜찮은 주식 동영상이나 카페, 책을 찾아보면서 기본적인 것들을 공부하고, 소액으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본 뒤에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면 적어도 나처럼 피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살아남읍시다, 부디
 
지금도 나는 하루에 얼마간이라도 시간을 내서 경제 공부를 하고, 종목을 찾기 위해 재무제표를 분석하고, 내가 가진 종목의 추이를 살피고, 나름의 매매 계획서와 매매 일지를 작성한다. 그러는 이유는 한 가지. 숫자와 차트와 수익률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조금 더 오래 살아남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잃었던 돈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판단하고 매수했던 종목이 올랐을 때의 짜릿함은 말로 못한다.
 
주식 시장은 비정하고, 아쌀하다. 수익으로 말하는 곳이다. 예전에 주식하는 사람들 모임에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선 스스로 고수라는 걸 입증하려면 무조건 계좌를 '까야' 한다. 수익률이 낮거나 마이너스면 자기가 아무리 주식을 오래 했어도 그 자리에선 하수다. 처음엔 뭐 이런 명징한 세계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고수라는 것이 입증되면 그때부터 하수인 사람들은 종목에 관해 묻기 시작한다. 물음의 99%는 무'슨 종목을 얼마에 샀다가 얼마를 물렸는데 어떡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슬프고도, 아련한 풍경이다.
 
주식은 안 하면 본전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맞다. 안 하면 본전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느낌이다. 영화 <어벤져스>를 보면 "3000만큼 사랑한다"고 고백하던데 빗대어 생각해보면 나는 불행하게도 800만큼 헤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겨우 어느 정도 길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꽃길은 아니다. 자칫하면 빠지기 십상인 얼음판이다. 오늘도 나는 이 살얼음판을 한 발자국씩 조심스럽게 걷고 있다.  
 
이 글을 어떤 사람이 읽을지는 모르겠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비정하고 아쌀한 이 세계에, 안 하면 본전인 주식 시장에 들어와 있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살아남읍시다, 부디.
 문경에 가면 아나키스트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열 의사 기념관'이 있다. 영화 <박열>에서 배우 이제훈이 그 역할을 연기할 때까지 나는 박열이라는 사람에 대해 몰랐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난 후, 영화가 역사적 인물을 담고 있지만 배역은 실제 인물의 삶을 부분적으로밖에 재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훈이 그의 선 굵은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지만, 기념관에서 본 실제 박열 의사의 얼굴선과 눈빛은 더 짙고 강하게 느껴졌다.

박열 의사는 문경에서 태어나 자랐고, 18세인 경성고보 3학년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의 추적을 피해 그해 10월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1925년에 천황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대역죄'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20여 년을 감옥에 있는 동안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945년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박열 의사 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그는 이후 귀국하여 1948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에서 납치되어 북으로 강제 이송되고 73세에 북한에서 서거했다. 북한에서 20년 넘게 살았으며 북에서의 그의 행적을 모두 알 수는 없다. 서거 당시 그는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에게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 훈장이 추서되었다.

박열 의사 기념관에는 박열 의사의 행적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1922년 의열단과 연계하여 폭탄을 반입하고 히로히토를 폭살하고자 했던 것과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의 이야기도 전시장의 상당 부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기념공원 내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그를 위한 추도식도 매년 열리고 있다고 했다. 그를 기억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고마웠다.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니 약산 김원봉이 떠올랐다. 그는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1918년에 난징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며 망명 생활을 시작했고, 3.1 운동 이후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천명하고 의열단을 창단, 단장에 오르며 일제 요인을 암살하는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시작했다.

1926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다가 1932년 대일 혁명세력을 결집하여 연합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했다.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기까지 그의 행적은 대한민국의 무장독립투쟁사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그가 태어난 밀양에 가면 김원봉의 이름을 딴 기념관은 없지만 '의열 기념관'이 있다. 의열단을 창단해서 일본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의열단의 투쟁사를 전시하고 있다. 묘하게 3.1 운동 이후의 두 인물, 박열과 김원봉의 행적이 겹치기도 하고 현재의 위상이 극명하게 다르기도 해서 박열 의사 기념관을 관람하는 내내 두 인물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단장으로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을 주도하며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원봉 열사의 기록은 의열단의 부록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난 광복절 기념식에서 그의 공적에 대해 언급된 것이 크게 논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은 진행 중이다. 명백한 독립운동의 이력이 있어도 그의 서훈에는 반대하는 현실이, 때마침 친일 이력이 있어도 칭송받으며 죽은 자와 극명하게 대비되어 안타까웠다.

김원봉은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임시정부 제2진으로 귀국해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1948년 남북협상 때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월북한 뒤 북한에 남았다.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고,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그의 월북에는 남쪽에서 친일파가 득세한 것과 친일의 잔재가 뿌리를 내리려는 당시의 현실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했고, 영화 <암살>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길은 곧지 않다. 굴국이 많고 변형도 많다. 그 많은 것들을 거슬러 역사를 바로잡기에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당연하다. 박열 의사의 기념관을 둘러보며 생각해 보았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기까지 우리에게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시간이 주어진다면 바로잡을 수는 있는 것일까.

남과 북의 분단의 시간만큼 골이 깊듯이, 한 체제 내에서도 이념의 분쟁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한 사안을 가지고 서로 다른 기준으로 비판하고 대립한다. 이러한 이념 분쟁의 끝이 오기는 할까.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의 땅인 한반도가 과거를 거슬러 화합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이념 대립은 끝이 날까. 그때가 되면 우리의 굴절된 역사가 바로 세워질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친일 행적을 가진 사람들,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밖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면면을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역으로 반드시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의 이름자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기념관이 있어 그들의 노고를 기록하고 모아 두지 않으면 미래세대들은 더 알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박열 의사 기념관은 보는 내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약산 김원봉의 이름을 가진 기념관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해마다 3.1절이나 광복절에는 유공자로 추서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마주한다. 나라가 일제로부터 벗어나고 70년이 지나서야 그 이름이 독립운동가로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진작 알려졌던 독립운동가에게나 뒤늦게 알려지게 된 독립운동가에게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큰 빚을 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역시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은 아닐까. 박열 의사는 물론이고 약산 김원봉에게도, 이름도 없이 잊힌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시쩡~!!"

나는 와인을 한잔 들이키며 말했다. 진득한 향기, 감미로운 색상. 와인은 미치도록 나의 오감을 자극한다. 그렇게 와인을 음미하고 있는 찰나 영훈이형이 나를 보고 말했다.

"누군가는 말했지, 와인은 육감을 자극시킨다고."
"육갑?"
"육감."
"오감이면 오감이지 나머지 하나는 뭐야? 혹시 전지적 작가적인 감각인가?"


형은 어이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댓츠 노노, 와인의 색을 보며 시각, 와인의 맛을 보며 미각, 와인 향을 맡으며 후각, 와인잔의 온도를 느끼며 촉각, 스파클링 등 와인의 소리를 들으며 청각,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러한 와인의 세계를 그리는 공감각이 될 수 있겠다."
"나는 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공감각이라니?! 와인을 마시면서 무슨 상상할 일이 있어? "

"니가 아직 와인을 덜 마셔서 그래. 와인을 더 마시게 되면 공감각이 발현되게 되어 있어. <신의 물방울>을 보면 주인공이 와인 한 잔 마시며 프랑스 밭의 샤또가 펼쳐져 보인다고 하지? 그런 걸 느끼게 되는 거야. 바로 공감각을 발현 시켜서 말이야."
"아니 와인 한잔 마시면서 무슨 공감각까지 발현을 시켜야 해? 그냥 맛있다 맛없다면 충분하지!"

"그렇지, 와인을 느끼는 기본은 맛이 있다 없다만 구분하면 충분해. 하지만 와인을 더 마시게 되면 알게 될 거야. 와인을 마시며 상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야."

 
 
형은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열변을 토했지만 당시에는 형이 해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와인을 마시고 난 뒤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와인은 오감 이외의 바로 공감각적 느낌이 필요한, 바로 상상이 필요한 음료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공감각적인 능력은 어떻게 발휘 되어야 할까? 와인과 연관은 있긴 한 걸까?
 
첫 번째. 와인을 마시기 전 와인의 맛을 상상하라.

와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들이 와인을 마시기 전에 향부터 맡는다. 와인의 향을 맡는 이유는 와인은 향으로 마시는 음료이기 때문에 그 향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향을 통하여 와인의 맛을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와인의 향 속에 숨어 있는 정보들 즉, 이 와인이 매울지, 산도가 어떨지, 어떠한 방식으로 제조를 했을지 향을 맡음으로써 상상해 볼 수 있다. 또 와인의 색을 보며 와인의 나이를 가늠해 볼 수도 있고 그 정보를 통하여 와인의 맛이 어떨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냥 바로 마시면 되지 이렇게 상상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바로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이다. 좋은 와인에는 굉장히 많은 정보가 녹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들은 안다는 건 바로 와인의 맛을 안다는 것과 직결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아는 만큼 보이는 것처럼 와인도 아는 만큼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와인을 마시기 전 시각, 청각, 후각 등을 통하여 최대한 와인을 느끼며 와인의 맛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와인의 향으로 그 와인을 전부 평가하긴 힘들지만 다양한 와인을 마셔보고 와인에 대한 감각을 키워 간다면 와인의 향으로 그 와인에 대한 느낌을 미리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와인의 향만으로도 설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와인의 맛을 보며 상상하라.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은 와인을 마시며 이렇게 표현한다.
 
"잘 치장한 귀족들의 우아한 파티가 이 와인 너머에 보였어."
"해바라기 밭에 저무는 석양. 나는 와인을 마실 때 그 향수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왜 주인공은 이런 표현을 썼던 걸까? 와인 한 잔에 이런 풍경이 실제로 펼쳐지는 걸까? 결론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이 정도로 와인을 표현 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와인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이고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보다 더 디테일하고 충만한 표현을 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와인을 표현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표현을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고 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 상상력을 발현하면 발현할수록 와인의 대한 표현력은 높아지고 또 와인이 재밌어진다. 그렇게 점점 와인에 빠져들게 된다.
 
상상을 이용하여 와인을 즐기는 또 한 가지 방법은 바로 '마리아주'이다. '마리아쥬'란 프랑스어로 결혼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말로 따지면 와인과 음식과의 궁합으로 보면 맞겠다. 와인은 어떠한 음식과 '마리아주'를 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차이가 크다. 그렇기에 내가 마시는 와인이 어떠한 음식과 조화를 이룰지를 항상 상상하게 된다. 그렇게 상상했던 음식을 실제로 매칭시켜 보고 환상의 궁합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렇듯 여섯 번째 감각인 육감을 통하여 와인을 이해 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보았다. 경험해 보지 않아 어려울 순 있겠지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와인을 마셔보며 느낌을 표현하고 상상력을 발휘 한다면 좀 더 와인을 재미있고 더 맛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와인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푹 빠져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오늘부터 육감을 발휘 하여 와인을 즐겨 보는 것은 어떨까?
며칠 전에 자동차 볼보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일이 있었다. 갑자기 왜 1위에 올랐을까? 이유를 찾아보니 박지윤 아나운서 가족 차가 2.5톤 트럭과 정면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있었다. 박 아나운서 가족이 탑승했던 차는 볼보 XC90으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스웨덴에서도 자주 본 적 있는 차량이다.

사고 당시 찍힌 모습을 보니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차가 반파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차량 충돌 후 박 아나운서 가족은 자력으로 차에서 탈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미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볼보가 안전의 대명사로 알려지긴 했지만 이 사고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차"라는 존재를 다시 입증한 셈이다. 검색어 1위에 오를 만한 일이었다. 

"그냥 볼보니까 좋다"는 남편 
 

내가 사는 스웨덴에서 남편이 곧 운전면허를 딴다. 걸으면 건강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며 차 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 때문에, 또 내 등살에 못 이겨서 운전에 관심도 없던 사람이 부지런히 학원을 다니고 있다. 마지막 주행 시험만 앞두고 있으니, 나는 남편에게 슬슬 차를 알아보자고 말했다. 그러자 자기는 이미 정했단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볼보라는 거다. 

7년을 함께 살면서 남편이 차에 대해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트레킹, 마라톤과 같은 활동을 좋아해서인지 차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볼보차 보는 재미에 빠져 산다. XC40로 할지 XC60로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아주 낯설 지경이다. 

남편이 볼보를 타고 싶은 이유는 '안전' 때문이다. 스웨덴 사람이라면 모두가 안단다. 볼보 차를 타면 크게 다치지 않을 거라며 볼보가 내세운 '제로비전'에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그래도 아주 큰 사고가 나면 죽을 수도 있지 않냐 되물어도 끄떡없다. 볼보라서 믿을 수 있고 볼보라서 그냥 안전하단다. 남편은 볼보를 타는 것이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믿는다.

남편만 그럴까? 아니다. 스웨덴 사람들이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아는 표현이 있다. 바로 3V(Villa, Vovve, Volvo)이다. 그들이 살면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인데, 이 세 가지를 가지게 된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여긴다.

빌라 Villa 정원이 있는 주택 
부베 Vovve 커다란 개 
볼보 Volvo 볼보차 


처음 이 말을 듣고서 '뭐지? 이 나라 사람들은 야망도 없나? 꿈 한 번 참 소박하네' 생각했다. 그런데 스웨덴에 살다 보니 이보다 더 스웨덴을 잘 표현한 말이 어디 있겠나 싶다.

스웨덴 사람들에게 성공이란 대단하고 위대한 게 아니다. 그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화려한 삶을 꿈꾸지 않는다. 그저 집이 있고, 정원에서 뛰어노는 강아지가 있고, 그 개를 실을 수 있는 큰 볼보가 있으면 인생의 목표를 이룬 것이다. 

나는 스웨덴 사람들이 무언가를 뽐내거나 자랑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나라답게 소소하고 여유 있는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 내 삶의 여유가 중요하고 현실적인 삶을 목표로 삼는다. 그 행복의 기준에 볼보는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이처럼 스웨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보를 가지는 꿈이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견고하고 안전을 지향하는 합리적인 자동차. 휴머니즘과 생명에 가치를 두는 스웨덴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볼보를 볼 때면 마치 스웨덴 사람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국가와 기업이 뜻을 함께해 더 안전한 나라로

볼보가 안전의 대명사가 되기까지, 볼보는 회사 차원에서 수십 년간 안전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 노력은 인류 전체를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3점식 안전벨트는 볼보의 엔지니어였던 닐슨 볼린이 최초로 만들었다.

이 벨트는 약 60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획기적인 안전 발명품으로 꼽힌다. 또 전방 에어백, 사이드 에어백, 커튼형 에어백, 차일드시트 뒤보기도 볼보에서 개발한 것이다. 독점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은 이 모든 기술에 특허를 내지 않았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는지는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모두가 안전하길 바라는 볼보의 가치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볼보는 홈페이지에 지난 70년간 안전에 대해 연구한 자료를 모두 공개해 놓았다. 이 정도면 '인류 안전 지키미상'을 줘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볼보가 이토록 안전을 중요시 여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볼보가 태어난 곳, 바로 스웨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스웨덴에서 안전은 기본 중에서도 아주 기본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무슨 특별한 안전 DNA가 장착된 것처럼 정말 안전을 중요시 여긴다. 특히 볼보의 Volvo Safety Vision – Zero Accidents(사망자, 중상자 0 프로젝트)가 있기 전에 스웨덴 정부에서 내세운 비전 제로(Vision Zero)가 존재했다. 1997년도에 스웨덴 정부는 도로 안전을 위해 비전 제로라는 프로젝트를 세웠다. 교통 사고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지 않는 게 목표이다. 인간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용납하지 말자는 게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다. 

그러나 사람이라서 완벽할 수가 없지 않은가.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자는 말 자체가 불가능하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사람의 생명이나 건강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스웨덴은 도로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정면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중앙 장벽을 더 많이 설치하고 일반 교차로들을 회전 교차로로 교체했다. 특히 스웨덴 정부는 더욱 안전한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자동차 산업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사망자 수치를 전보다 반으로 줄일 수 있었지만 제로에 근접한 수치는 아니었다. 그래서 정부의 비전 제로와 함께 현재 볼보도 '제로비전'을 내세우고 도로 위 안전 강화에 힘쓰고 있다. 국가와 기업이 뜻을 함께해 스웨덴이 더 안전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실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안전에 강화를 두다 보니 스웨덴에서는 운전대 잡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특히 운전면허 시험은 한 번에 합격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모든 게 안전과 연결되어 있어 더욱이 그렇다.

내가 운전을 하지 않더라도 차가 안전에 신경 쓴다는 걸 저절로 느낄 정도다. 실제로 스웨덴에서 보행자로서 위협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횡단보도 근처로 가는 나를 보고서 멀리서부터 차는 서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길을 건널 때까지 기다려준다. 

스웨덴 사람들의 공통적인 습관으로 꼽을 수 있는 것도 안전벨트다. 그들은 차만 타면 무조건 안전벨트를 매는 습관이 있다. 한번은 한국 뒷좌석에서 안전벨트를 매는 남편을 택시 기사님이 신기하게 바라볼 때가 있었다. '불편하게 왜 뒤에 타면서 안전벨트를 매지?'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그런데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 차를 탔는데 안전벨트를 안 맬 수 있지?"라는 반응이었다. 나도 처음엔 불편했지만 지금은 습관처럼 차만 타면 무조건 안전벨트를 멘다(한국에서도 2018년부터 버스, 택시 등 뒷자석 안전벨트 착용이 의무화 됐다. - 편집자말).   

아동 카시트도 빼놓을 수가 없다. 스웨덴에선 카시트 없이 아이를 태우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택시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택시를 부를 때 카시트 여부를 확인하고 아이 시트에 해당되는 추가요금 약 50~100kr(한화 약 8000~14000원)를 낸다. 처음에 가격을 듣고 너무 비싸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전벨트를 만든 것도 볼보가 처음이지만 뒷좌석 안전벨트 의무, 카시트 뒤보기를 시행한 것도 스웨덴이 최초이다. 그리고 스웨덴 사람들은 차를 타기 무섭게 어디서든 몇 분을 타든 안전벨트를 맨다. 모두가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그 의무를 다한다. 아무튼 안전을 생각하는 건 스웨덴이나 볼보가 참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우리한텐 볼보가 있어" 예테보리의 자부심 

볼보는 명실상부 이케아IKEA와 함께 스웨덴을 대표하는 기업이다. 중국의 지리에서 '볼보자동차'를 인수해 이제는 중국 기업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자본만 중국일 뿐 기술과 디자인을 비롯한 자동차 개발은 여전히 스웨덴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살고 있는 예테보리Göteborg(스웨덴 제2의도시)는 볼보의 고향으로, 볼보 그룹과 볼보 자동차의 본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일화로 서울과 부산처럼 지역 싸움(?)이 일어날 때 예테보리 사람은 수도 스톡홀름 사람에게 "우리는 볼보가 있어" 말한기도 한단다. 그만큼 예테보리 사람에게 볼보는 지역의 상징이자 자부심으로 여겨지는 게 아닐까 싶다. 
 

스웨덴 정부가 투자를 아끼지 않는 분야가 있다면 환경, 재생에너지와 같은 지속가능성 개발이다. 볼보에 다니는 지인도 "볼보가 추구하는 가치는 안전뿐만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볼보가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자동차와 에너지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정부도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볼보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차를 만들고 있다며 드라이브 미(Drive me)라는 프로젝트 영상을 나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예테보리시, 스웨덴 정부와 함께 하는 자율주행(AD) 자동차 실험 드라이브 미는 예테보리를 친환경 미래혁신도시로 만드는 계획이다. 여기서 볼보 자동차의 자율주행 기술은 환경 오염을 줄이고 혼잡한 도로에서 벗어나 운전자들이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운전자가 필요 없는 자동차, 주차 공간 걱정 없는 세상, 혼잡하지 않은 도로가 실현될 수 있도록 스웨덴 정부를 비롯해 스웨덴 도로교통공사, 예테보리시까지 지원에 나선 거다. 국가와 기업, 지자체가 비전을 함께하는 이 계획으로 예테보리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이 도시에 사는 사람으로서 기대가 된다.

스웨덴에 살면서 볼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다면 단순히 자동차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스웨덴에서 누군가는 볼보를 갖고 싶은 꿈이 있고 누군가는 그 차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줄 것이라 믿는다. 한 고장의 상징이자 스웨덴의 미래 산업을 이끌고 있는 볼보가 스웨덴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모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대부분 허탈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가득 차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스웨덴 사람들의 삶에 늘 볼보가 함께 했다. 스웨덴 사람들의 많은 추억과 안전을 책임져준 볼보는 그들에게 친근하고 익숙한 브랜드 그 이상이다. 오랜 시간 사람을 먼저 생각해 온 볼보의 가치관 역시 스웨덴 사람들에게 '찐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우리 가족은 볼보의 어떤 차를 타게 될까? 뭘 고르든 안심이 된다. 볼보니까.
최근에 공모전에 떨어졌다. 전화 연락이 없어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는데 홈페이지에서 직접 확인을 하고 나니 서운하다. 아쉽다. 마음속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부는 것 같다.

"아, 떨어졌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소파에 앉아있던 아이가 쪼르르 내 옆으로 와 묻는다.

"엄마 이번이 몇 번째 떨어지는 거야?"
"어? 네 번째인가?"


폴더를 열어 확인해보니 네 번째가 아니라 여덟 번째다. 기분이 좋지 않다.
 
세상에 있는 모든 창작물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책, 영화, 그림들. 그것들도 모두 처음이 있었을 거다. 그리고 한 번에 뚝딱! 하고 만들어지진 않았을 거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렇게 저렇게 다듬어져 완성됐겠지.

'그래, 모든 건 다 그런 거야. 다 시간이 필요한 거야.'

여기까지 생각해서 마음이 나아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그냥 책을 읽는다. 신기하게 상황에 맞는 문장들이 나를 찾아온다. 나에게 말을 건다.
 
한 방에 훅 가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을 빌리자면 지켜보는 이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나날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잤으며 작은 시간들을 어떻게 쪼개 썼느냐에 따라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권위와 능력이 주어질지 정해진다. 지켜보는 이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나날을 내가 어떻게 썼는지는 결국 표면에 떠오른다. 마치 한 방에 훅 가는 것처럼 떠오른다. (뜻밖의 좋은 일, p84)
 
한 방은 없구나. 그래, 아직은 더 쌓여야겠지. 난 힘을 얻고 일어난다. 다시 심기일전해서 다른 공모전을 찾고 글을 쓴다. 난 글을 쓰고 나면 객관성을 잃는다.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의 피드백이 궁금하다. 이번에도 난 내 첫 번째 독자인 동생에게 먼저 글을 보낸다. 동생은 백이면 백, 이런 피드백을 보내온다. "언니, 갈수록 글이 자연스럽다! 정말 재미있는데! 서점에서 파는 책이라고 해도 믿겠어."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감이 생긴다. 그러면 정말 객관적인 평을 해줄 수 있는 주변이들에게 글을 보여준다. 보통 안 좋은 피드백은 살짝 돌려서 하기 마련인데 정말 오랜만에 솔직한 피드백을 받았다. 지인 A의 답변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좀 지루해요. 에피소드 소재들도 밋밋하고요. 누가 출간할 정도로 재미있어 할까요? 솔직한 게 좋은 것 같아 제 느낌을 그대로 보내요."

솔직한 평을 바랐건만 날 것이 오니 당황스러웠다. 평소에 작품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오해하고 날을 세우는 사람들이 싫었는데 내가 딱 그 모습이다. 한 작품에 대한 비판을 확대 해석해 '난 글쓰기에 재능이 없나 봐'라는 생각까지 든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평들도 있었지만, 직설적인 비판(?) 한 개의 힘이 더 컸다.
 
며칠 뒤, 작가 선생님께서 내 작품을 보고 합평해 주시는 날이 되었다. 가기 싫다. 하지만 과제를 내고 합평 받는 날 빠질 수는 없다. 책임감 때문에 억지로 가서 앉아있는데 선생님이 생각지도 못한 칭찬을 해주셨다.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문장이고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어머나! 기분이 좋아 어깨가 으쓱거린다. 
 
선생님의 합평은 내 글을 다듬을 힘을 주었다. 그 힘으로 부족한 글을 다시 쪼개고 붙이고 다듬어 더 나은 글을 만든다. 머리카락이 새하얘질 정도로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한동안은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꾼 기질이 있다'는 말이 날 버티게 해주었다. '이젠 감을 잃었나 보다' 했는데 다시 그런 말을 들으니 힘이 난다.

며칠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개그우먼 장도연이 나왔다. 긴 무명시절을 "너는 무조건 될 거야"란 신동엽의 말로 버텼다고 했다. 잘하고 있다는 인정과 지지가 그 사람을 앞으로 가게 한다. 책에서 만난 위로의 문장이나 다른 사람의 격려가 다시 날 일으켜 걷게 한다. 때로는 뛰게도 한다.
 
프랑스 작가 콜레트는 누군가를 제대로 격려해주는 일이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대로 격려하는 일은 세심한 관찰과 애정이 필요하다. 그냥 툭, 던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나도 그런 격려자가 되고 싶다. 그 사람을 일으키고 나아가게 하는 세심한 격려를 하는 사람.

적절한 지적이 필요할 때는 최대한 뾰족한 말을 잘 다듬어 오해하지 않게 전달하는 지혜도 있으면 좋겠다. 많은 경우, 상처받는 것은 사실(fact)때문이 아니라 말의 표현이나 뉘앙스 때문이다. 나도 지루하다는 평보다 '출간할 정도로 재미있어 할까요?'에 기분이 상한 것이니까. 나는 A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신기하게 그를 싫어했던 마음이 조금씩 녹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좋은 사람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