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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걸' 슬릭X효연, 편견 깨고 베스트유닛 등극→저스트뮤직&위더플럭과 대결 시작[종합]
[OSEN=심언경 기자] '굿걸' 슬릭과 효연이 모두의 편견을 깨고 베스트 유닛에 등극했다.28일 방송된 Mnet 'GOOD GIRL : 누가 방송국을 털었나'(이하 '굿걸')에서는 멤버들이 베스트 유닛 결정전에 이어 저스트뮤직&위더플럭과의 첫 번째 퀘스트에 참여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굿걸' 멤버들의 베스트 유닛 결정전이 시작됐다. 치타와 전지우가 공연의 포문을 열었다. 음악 취향부터 음색까지 비슷한 두 사람은 리아나의 'Desperado'를 선곡했다. 전지우는 노력으로, 치타는 '짬바'로 ...
내 연인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는 나와 동거하기 전까지 홍대 근처에 창문이 없는 고시원 311호실에서 살았다. 부모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그에게 높은 보증금을 요구하는 서울의 집값은 진입하기 어려운 장벽이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연인 관계에 들어서게 된 뒤에 그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약간은 민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고시원으로 나를 초대했다. 나라고 대단히 주거 환경이 좋은 집에서만 지내온 건 아니다. 하지만 창문과 화장실이 없는 그 방을 보고 순간 내 얼굴은 고시원을 처음 봤을 때 아연실색한 정치인 정몽준의 표정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지내던 고시원은 간판에 홍보 문구랍시고 "고품격 주거공간"임을 적어놨는데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 그에게는 일정한 월급이 나오는 직장이 있었지만, 그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증금을 모으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는 월급이 잘 모이지 않는다면서 작게 웃었다. 그를 내가 살고 있는 원룸으로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6평 원룸에서 시작한 애인과의 동거
 
 
스스로 결정을 내린 뒤로 나는 그에게 같이 살면 좋은 점을 끈질기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우리는 월세를 반으로 나눠서 살 것이기 때문에 고시원 정도의 돈만 내도 함께 살 수 있다, 방을 더 넓게 쓸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사는 곳에는 창문이 있다, 그리고 나는 코를 하나도 안 곤다, 이도 갈지 않는다 등 사탕발린 말을 했다. 사실을 밝히자면 나는 피곤할 때 코도 골고 이도 갈고 잠꼬대도 하지만, 나 혼자 살 때는 그걸 몰랐다.
 
그를 내가 사는 곳에 데려와 이 집의 좋은 점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는 결국 내 요구에 못 이겨 이사를 왔고 나와 같이 살게 됐다. 이사를 왔다기엔 적은 옷가지와 책 몇 권을 챙겨온 것이었지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물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사는 원룸도 두 명이 쓰기에는 많이 비좁은 6평짜리 방이었기 때문이다. 1명당 3평씩을 쓰는 꼴이었다.

집안일로 싸우는 적은 없었지만 우리는 나날이 물건을 둘 곳이 없어 책상 위로, 또 위로 쌓았다. 거의 내 키 높이만큼 옷들이 쌓여서 내가 까치발을 들어야 옷을 쌓을 수 있게 됐을 무렵, 애인과 계속 같이 살려면 이 집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옷을 제때 안 치우는 못된 버릇이 있긴 했지만 일단 6평의 공간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들었다.

"안 되겠어. 이사를 하자."

비장한 내 말투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전쟁이 시작됐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중소기업이라서 나는 최대 1억의 중소기업청년전세자금대출(중기청)을 받을 수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이 빼곡하게 찰 때까지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을 깔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퀭한 얼굴로 틈만 나면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았다. 자다가 깨서도 앱을 뒤적이다가 해가 밝아오고 나면 다시 잠들었다. 하루는 이사를 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고 나서는 허탈해했다.
 
앱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서울에 우리 두 명이 살 만한 1억 내외의 전셋집은 없었다. 반지하 매물들도 이따금씩 튀어나왔다.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은 곳은 '중기청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쳐다봐봤자 시력만 상할 뿐이었다. 지금 지내는 곳 근처에 적절한 매물이 없어 보이자, 결국 서울 전역을 대상으로 마음에 드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서울 하늘 아래서 연인 둘이 집을 구한다는 것
 
어느 날은 연인과 휴가를 내고 매물을 보러 돌아다니기로 했다. 하루에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10군데의 집을 방문했다. 어느 공인중개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 가격에 어디 가서 이런 집 못 구해."

1995년에 지어진 빌라는 투룸이었지만 정체 모를 냄새가 심하게 났다. 후각이 예민했던 나는 집 안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조차 없었다. 부동산 주인들은 중기청 대출을 끼고 고작 1억 내외의 집을 보러 다니는 우리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 매물은 이미 나갔고, 여기 매물 더 좋은 게 있어"라는 말을 무수히 많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꾸역꾸역 찾아간 곳은 반지하거나, 월세가 너무 높거나, 집 앞에 공사장이 있거나, 옆에 건물이 있어서 아예 집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지 않거나, 투룸이긴 하지만 평수는 사실상 원룸인 곳이었다.
 
부동산 직원들은 한결같이 "여기만큼 좋은 곳은 못 구하실 걸요"라고 했다. 뭐지? 공인중개사 시험을 볼 때 이런 말들을 미리 연습하는 건가? 이 생각이 들 정도로 천편일률적이었다. "이 보증금에 이런 집 없다"는 말을 하루 종일 듣자 내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그런 내 얼굴을 보는 연인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집을 한 번 계약하면 2년을 꼼짝없이 살아야 하니 눈을 아예 낮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온종일 매물을 보러 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엔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지금 사는 곳과 비슷한 6평 내외의 원룸 매물은 넘쳐났지만 더 넓은 집을 원하는 우리에게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가 같이 살기 위해서는 1억보다 더 큰 금액이 필요했다. 은행에 달려가서 내가 빌릴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을 물었다. 사회 초년생인 내게 은행이 빌려줄 수 있는 금액은 1억 1천만 원이 최대라고 했다.
 
수심에 잠긴 내게 은행 직원은 진지하게 조언했다.

"지금보다 더 넓은 집을 구하실 거라면 두 분이 따로 따로 전세대출을 받아서 방을 2개 구하는 게 나아요."

은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절로 눈물이 났다. 물론 은행 직원의 말은 아주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연인과 같이 살고 싶었다. 돈이 없으면 같이 살 수 없는 걸까.
 
 
결혼 안 하고 같이 살 수는 없을까요?

"결혼하면 서울시 신혼부부 임차보증금 지원사업으로 최대 2억 원(임차보증금의 90% 이내)까지 구할 수 있는데."

그는 쓰게 웃었다. 당장 전셋집을 구할 방법도 없는데 무슨 수로 결혼이란 말인가. 나는 입이 튀어나온 채로 "결혼해야 2억 대출을 해주는 건 차별이야"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계산을 시작했다. 한 달에 100만 원씩 모으면 언제 집을 구할 수 있는지를. 1억을 모으는 데 적어도 8년이 걸린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면, 제대로 된 집을 사기는커녕 퇴직을 걱정해야 할 나이에 가까워질 것이다.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을 주장한 책 <외롭지 않을 권리>(황두영 지음, 시사인북)에서 저자는 "원하는 사람과 같이 삶을 꾸릴 자유가 헌법적 권리라면, 그 틀이 꼭 혼인이어야만 할까?"라고 되묻는다. 형편이 되지 않거나 원치 않아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그저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일까?

세 달에 걸친 연인과의 집구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자다 깨서 부동산 앱을 들여다본다.
코로나19 감염 확산 이후 3월 신학기 등교가 무려 석 달이 지연되면서 학교 수업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학생은 고3이었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은 공교육이 제시한 온라인 도구를 통해 수업을 받았다.
 
초등, 중등 학생들의 온라인 수업이 시작될 때 학원에서도 상담전화를 진행 중이었다. 상담의 주요 내용은 "혹시 EBS 수업을 진행할 때, 자녀분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점이 있으면 도와드리겠다"였다. 일하시는 학부모들의 고충 중 공통된 점이 있었다.
 
"평소에 집에서 컴퓨터로 공부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온라인으로 수업을 따라오라고 하니까 너무 힘들어요. 부모들은 낮에 일하러 나가는데 수업을 집에서 하라고 하니, 아이들이나 저희들이나 컴퓨터 공부 방법을 익히는 것이 어려웠어요. 또 컴퓨터를 켜 놓고 나가면 아이들이 온종일 컴퓨터로 하루를 보내기도 하잖아요."
 
코로나19가 발병한 올해, 학생들의 첫 등교가 시작됐다. 지난 20일 고등학생 3학년을 시작으로 오늘(27일)은 중학교 3학년과 초등학교 1, 2학년이 등교했다.

초등학교 1학년은 소위 입학식도 없었다. 다른 해 같으면 입학식 전후에 '학교를 오기 전, 어떤 준비물이 필요한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등 많은 말을 들었을 것이다. 더불어 학원들도 홍보성 전단지와 선물을 준비해 초등 저학년을 환대했을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마음으로 그 어린 새싹들이 학교에 올까. 군산 푸른솔초등학교 1, 2학년 등교 현장에 참여한 선생님과 학부모 자원봉사자 분들께 전해들은 현장 풍경은 다음과 같았다.

반가움 속 조심, 또 조심
 
 
오늘 등교의 핵심은 말 그대로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이었다. 교문에서는 많은 선생님들과 학부모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을 기다리는 긴장감의 밀도가 높았고, 처음으로 등교하려고 한 줄로 서 있는 초등 1학년 학생들의 얼굴에도 왠지 비장함이 가득했다. 선생님들은 도착한 학생들에게 먼저 마스크 착용 여부와 체온을 측정했다.
 
교문을 통과한 학생들은 입실 전에 다시 한번 소독제 사용과 2차 체온 측정에 임했다. 각 교실은 기존 좌석을 최대한 멀리 배치했고, 교실 내에는 코로나 예방을 위한 게시물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담임 선생님을 만난 학생들이 1차로 들은 말은 당연히 코로나에 대한 얘기였다. 교실에서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지도가 이루어졌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친구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어젯밤 저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여러분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설렜답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서 선생님이 너무 기쁘고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 모두 안아주었을 거예요. 코로나가 물러가면 그때 모두모두 힘껏 안아줄게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계속됐다.

"지금부터는 우리 친구들이 꼭 지켜주어야 할 행동에 대해 말해 줄게요. 첫째, 아무리 가까운 친구가 옆에 있어도 꼭 거리를 두고 말해야 해요. 그렇다고 너무 큰 소리로 말하면 목이 아프겠지요. 둘째, 수업 시간에 모둠 활동을 할 수 없답니다. 셋째, 집에서 가져오는 간식은 학교에서 먹을 수가 없어요. 대신 학교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어요. 넷째, 선생님의 말에 집중해서 잘 들어주세요. 다섯째, 교실 뒤 게시판에 써 있는 그림과 글을 꼭 읽어보고 궁금한 점은 언제든지 질문해주세요."
 
등교 전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공고된 내용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학부모님 가정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안전한 학교급식을 위하여 본교는 식생활관 특별소독 실시, 방역용품 비치 등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다음의 협조사항을 안내해 드리오니, 가정에서도 많은 이해와 협조 부탁드립니다. "
 
▣ 학생간 접촉이 최소화될 수 있는 학교 급식 운영 방안
- 학년별, 반별 시차를 두어 급식시간 연장 운영
- 지그재그 앉기
- 앉지 않는 식탁에 자리 비워두기 스티커 부착
- 거리두기를 위한 식당 내 한줄서기, 바닥 스티커 부착
- 학생 자율배식대 한시적 운영 중단(단, 배식대에서 추가 배식 가능)
- 비말 감염 우려가 높은 정수기 사용 금지(개인 물병 지참)

▣ 학생 급식 지도
- 식사 전 교실에서 발열체크(담임교사) 후 식생활관 입장
- 깨끗이 손씻기
- 식생활관 입장시 마스크 착용 및 ‧손소독 실시
- 수저, 젓가락, 식판은 자원봉사자 활용하여 학생들에게 배분
- 담임교사 및 지도교사 배치하여 급식지도 강화 (대화 자제, 급식 나눠 먹지 않기 등)

▣ 학부모님 협조
- 학교식생활관 출입 자제(급식모니터링 한시적 중단)

 
학교에서의 첫 점심시간.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지도에 따라 바닥에 놓여진 발바닥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총총히 밟으며 급식실로 향했다. 학부모 자원봉사자들이 학생들 개개인의 식판과 숟가락, 젓가락을 직접 챙겨주었고, 학생들의 좌석까지 안내했다.
 
1, 2학년 학생들이 귀가할 때까지, 학교 선생님들과 학부모 자원봉사자들의 긴장감은 여전했다. 오늘의 첫 등교 테이프를 잘 끊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어서 빨리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공부하기, 친구 만나기 등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학교생활이길 기도했다.

칸막이가 사라질 그날을 기다리며
 

학교에서 돌아온 학생에게 "오늘 어땠어?"라고 질문했다. 신기하게도 학생의 첫 대답은 이랬다.

"우리 선생님 이름은 000이에요. 우리들에게 진짜 친절하게 얘기해줬어요. 매일매일 만나고 싶어요. 그리고 친구들하고 얘기할 때 칸막이도 없으면 좋겠어요."
 

학교를 나타내는 'school'의 어원은 '여가'라고 한다. 배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담고 있는 곳이 학교다. 학문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을 배우고, 친구를 배우며 성장하는 곳이다. 이제 시작했다. 6월의 짙은 초록색 세상이 열렸다. 다소 더딜지라도 돌 담장위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장미보다 더 고귀한 학생들이 만드는 사랑스런 세상이 시작될 것이다.
 
온라인 수업을 끝낸 아이가 주섬주섬 책가방을 챙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동안 했던 학습꾸러미와 만들기를 가방에 가지런히 넣는다. 새 학년에 신을 거라며 샀던 실내화도 작아지진 않았는지 다시 한번 신어 본다. 그리고 내게 재차 확인한다.
 
"엄마 내일은 학교 가는 거 맞지? 내가 가는 번호 맞지?"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반 아이들을 짝, 홀수 번호로 나눠 홀수는 목요일, 짝수는 금요일에 등교를 한다. 딸 아이 번호는 7번. 그러니 내일 가는 것이 틀림없다고 얘기해주니 아이는 팔짝 팔짝 뛰며 좋아한다. 친한 친구도 홀수라 내일 반에서 만나게 될 거라며 더 호들갑이었다. 선생님에 대한 기대도 엄청났다.
 
"선생님 파마하셨어? 엄마보다 나이 많아? 말투는 어때?"
 
평소 말 많은 아이답게 선생님에 관한 끝없는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그동안 '랜선 선생님'이었던 분을 실제로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는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짠했다. 당연한 일상이 이렇게나 간절한 것이었다니 싶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팔짝 뛸 정도로 좋아하는 아이처럼 나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아이들 때문에 화딱지가 날 때만 해도 개학만 하면, 어떻게든 개학만 하면 얼씨구나 하고 춤이라도 출 기세였는데, 마음이 바뀐 건 바로 요 며칠 가까운 옆 동네에 발생한 초등학생 코로나19 확진자 소식 때문이다.

오늘 아침엔 학원 강사의 확진 소식까지 들려왔다. 지역 카페에선 그 일로 떠들썩했다. 아이를 보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엄마들의 의견도 분분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일주일에 하루 가는 건데 체험 신청서를 내고 보내지 말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아이에게 가지 말라고 하는 것도 너무 잔인한 처사인 것 같았다. 보내도 걱정, 안 보내도 걱정,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더 큰 걱정은 둘째 아이는 내일이 개학이지만 큰 아이는 다음 주가 개학이다. 같은 집에서 등교를 따로 하는 것도 이상한데 남은 아이가 느끼게 될 공허함은 어떨까 싶다. 온라인 수업에 지친 큰 아이가 동생의 등교를 부러워하며 힘 빠져 할 것이 눈에 선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오전 나절 내내 고민만 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은 언제까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니 조심시키며 보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도 학교를 보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참이었다. 
 
 
언젠가 한 전문가가 그랬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난생 처음 겪는 개학 형태를 체감하니 그 말이 너무 와닿았다.  

우린 앞으로 예전과는 또 다른 모습의 학부모와 학생으로 새로운 등교 일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이와 나 모두 불편하고 어렵다 느낄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냥 예전을 그리워 하며 탓하기 보다 새로운 일상에 더 안전을 기하고 하루하루를 소중히 다루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기대로 가득 차있는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내일 학교 가서 재밌게 지내다 와."
나는 평소 조용히 혼자 노는 걸 즐겨 한다. 뜨개질하는 것도 좋아하고, 음악 듣고 사색하고 보내는 조용한 시간이 참 좋다. 그런 나에겐 오랜 세월을 차(茶) 공부를 같이하고 한길을 걸어가며 미래를 꿈꾸었던 친구가 있다. 나보다 훨씬 적은 나이지만 더 어른스럽다.
 
우리는 같은 지역에서 처음부터 함께 차 생활을 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문화원을 개원했다. 다도 교육한 내용을 토대로 한 번 씩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형님, 야생화 자수 수놓기 한번 해보세요" 하고 권했다.
 
실은 행사할 때면 차(茶) 외에도 전시해야 할 품목들이 필요했다. 야생화 자수 또한 그 중에 한 부분이다. 사람마다 한 분야씩 나누어 특기에 따라 일을 나누고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했었다. 내가 맡은 분야는 야생화 자수놓는 일이다. 행사장을 예쁘게 장식하도록 수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러한 동기로 야생화 자수 수놓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십여년 전, 그때는 주변에 자수를 배울 만한 곳도 없었고, 인터넷으로 어렵게 정보를 찾고 혼자서 자료 준비하고, 연습을 해야 했다.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마음에 드는 자수가 있나 찾아보며 컴퓨터와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 날 자수가 내 마음에 쏙 드는 곳을 발견하게 됐다. 자연 속에 야생화가 피어 있고 집 풍경이 너무 예쁜 곳이었다. 자수와 소품들이 잘 어우러진 집안은 정감이 있으면서 운치가 있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 가 볼 기회가 있으려나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자수의 세계를 만나다
 
셋째 딸이 분당에 살고 있을 때다. 막내 딸은 직장에 다니면서 셋째 딸과 같이 살고 있었다. 군산에서 잠깐 딸네 집에 올라 갔었다. 마침 막내 딸이 쉬는 일요일이었다. "엄마, 어디 가고 싶으셔?" 하고 막내 딸이 물어봤다.

"으응, 실은 나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그 곳은 이천에 있는 '보OO 하우스'였다. 인터넷에서 주소를 찾아 방문해도 되는지 전화로 허락받고서야 막내 딸과 출발을 했다. 가고 싶던 곳을 찾아가니 마음이 설레면서 궁금하기도 했다. 음악 틀어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풍경도 상쾌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게 달려 도착해보니 그곳은 생활 도자기를 팔고 자수 수강도 하는 곳이었다. 내가 사진으로 본 그 집은 주인이 살고 있는 가정집이었고, 찾아간 곳은 가게였다.
 
작품에서 느꼈던 만큼 단아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반겨주는 사장님은 친근한 인상이셨다. 예쁜 그릇들, 멋진 인테리어, 수놓은 작품과 판매하는 옷이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모여 있었다. 기분이 마냥 들뜨고 흥분까지 됐다. 한쪽에서는 옷을 만들고, 만든 옷에 수를 놓았다. 너무 예뻐 나도 꼭 만들어 입고 싶어 천을 구입하고 자수 도안도 구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잔뜩 생겼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기분도 상승하고 행복하다. 할 일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듯 마음이 바빠진다. 수놓아 입을 치마 생각에 한껏 기분도 좋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데 행복하고 들뜨고 마냥 신났었다. 사람은 저마다 좋아하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삶을 즐기고 추구하며 살아간다.
 
평소에 너무 오고 싶었고 좋아하는 곳이란 말을 하니 웃고만 계신다. 궁금한 부분에 대해 물어보고, 수를 배우고 싶어도 집에서 너무 먼 곳이라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말을 하니 제일 많이 사용하는 자수기법과 도안을 챙겨 주셨다. 어쩌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쉽지 않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는지 지금 생각해보아도 너무 고맙고 감사한 분이다. 자수에 필요한 천과 몇 가지 물건들을 구입했다. 얼마나 흐뭇하던지 평소에 밀려온 숙제를 말끔히 해낸 기분이었다.
 
막내 딸이 있어 감사하다. 내가 해결 못하는 부분을 살뜰히 채워주어 고맙고 고맙다. 늦둥이 딸을 낳고 고생했던 날들을 보상이라도 해주듯 딸은 내게 살갑게 많은 걸 채워준다. 참 세상사는 돌고 돌아 서로가 빚을 지고 갚고 사나 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결국 사랑의 힘으로 살아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가족이란 둥지에서 나로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그날 이후 자수 놓기에 매진하고 점점 실력이 향상되면서 수놓기가 즐거워졌다. 차 생활에 필요한 소품과 집에 놓이는 소품들도 만들고, 딸들이 원하면 작은 것들도 만들어줬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해 주는 기쁨은 내 삶에 또 다른 즐거움과 활력을 찾아줬다. 목표가 있으니 꾸준히 노력하는 동기가 되었다. 시간만 나면 수를 놓고, 수 놓는 생활이 일상이 됐다. 고생해서 작품이 나올 때 느끼는 기분도 남달랐다.

야생화를 수 놓으며 배우는 것들
 
 
자수 전시회가 열리면 사람들이 구경하면서 예쁘다고 칭찬해줬다. 기분도 좋아지고 성취감도 느낄 수 있어 더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가끔씩 자수 놓기 봉사도 했다. 성당에서, 또는 지인들에게, 다도 회원들에게도. 어느 날부터 내 이름은 자수 선생님이 되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늘 투자하고 노력한 결과였다.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만족했다.
 
새롭게 도전하고 노력하다 보니 또 다른 세상과 만나게 된 것이다. 잠시 잠깐 내 인생의 시간에서 수를 놓으며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 보았다. 우리가 사는 삶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내게 주어진 나만의 삶에 길이가 있다. 나는 곰곰이 내 삶에 방향을 찾아서 사유하고 내 의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야생화 자수는 주로 야생화 꽃을 수 놓는다. 수를 놓으며 꽃과도 만났다. 산책을 하거나 길을 걷다가도 꽃을 보면 유심히 꽃모양을 살핀다. 잎모양까지도. 계절마다 피는 꽃, 어떤 모양이 가장 예쁜 모습일까? 꽃을 관찰하고 대화를 하면 마음 안에 꽃처럼 예쁜 생각들이 몽실몽실 피어 난다. 각종 꽃의 색감, 꽃말 등 알아야 할 것들이 많다. 한 분야의 세계를 들어가 보면 그 세상만큼 보이는 것이 있고 신비롭다.
 
 
수를 놓으며 하고싶은 걸 맘껏 누렸다. 입고 싶은 옷에 수도 놓고, 지인들에게 선물도 했다. 사는 것은 나이와 부합을 한다. 지금은 쉼을 하고 싶었다. 직업으로 전문가가 되지 않으려면 멈추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이 나면 다시 놓을 수 있고, 내 것으로 내 안에 남아 있는데 어려울 것 뭐 있겠나 싶었다.

수를 놓는다는 것은 마음을 내어 주는 일이다. 어쩌면 사랑이기도 하다. 나의 도전 열정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자수, 그것은 내 인생에 한 부분, 한 페이지로 남는다. 수를 놓고 도전한 시간은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고 다른 새로운 인연과도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전이 가져다주는 풍요와 행복은 나의 선택에 있다.

우리 가족은 남편의 직장 발령으로 중국에 산다. 아이들 방학 때마다 귀국하는데, 한국에 들어오기 얼마 전부터 친정으로 택배가 배달된다. 아이들 옷과 레토르트식품, 지금 필요한 수학 연산이나 국어 문제집까지 범위는 다양하다.

엄마는 평소에는 얼굴도 모르던 택배기사님과 하루가 멀다 하고 마주하며 택배를 받아놓으신다. 그리고 내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갈 수 있는 음식을 냉동시키기 위해 냉장고도 조금씩 비워두신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못한 것들을 보상이라도 받듯 결제하곤 했다.

지금은 내가 중국으로 출국하는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내 의지로 날짜를 미룬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외국인 입국이 금지된 상태이고 패스트 트랙은 기업인들에게 일부 허용되어 있다. 나는 남편을, 아이들은 아빠를 넉 달 째 못 만나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머무를 수 있는 날짜는 기약 없이 길고, 쇼핑도, 먹거리도 원할 때 결제할 수 있는데 나는 반대로 쇼핑을 멈추었다. 겨울에 입고 온 옷과 엄마 옷으로 입고 버티다가 날씨가 더워지면서 결국은 여름 옷을 장만하긴 했지만 방학맞이로 들어왔을 때보다 택배가 현저히 줄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었을까? 그렇게 고생해서 챙겨가지 않아도 되었는데 누리지 못한 자유가 갑자기 생기면 마치 그런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나는 쇼핑을 했다. 그곳에서 전혀 소비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한국처럼 최신 유행 스타일의 옷을 비교해가며 사지 못하고 신상 라면이 출시되어 인기가 뜨거울 때 그 열기가 식으면 먹을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부족하다기보다는 불편하거나 조금 늦을 뿐이다.

오프라 윈프리의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에 인용되어 나오는 내용 중에 소비를 하면서 내가 원하는 삶을 구매하고 싶어 한다는 글이 있다. 물건을 산다고 해서 그 삶을 살아지는 것도 아닌데 나 역시 잠시나마 원하는 삶에 가까워져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도 어쩌면 누군가에겐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을 받고 있을 수도 있는데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하는 보통의 사람이다.

방학 때만 올수 있었던 한국에 이렇게 오래 있음에도 전혀 그 시간을 즐길 수가 없는 것은 첫번째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고 두번째는 이러한 문제가 있을 때 그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의 차이이다. 첫번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고 두번째 문제는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할 수 없는 일만 마음에 담고있으니 누릴 수 있는 시간들을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힘들다. 사실 이보다 더 힘든 날이 또 올까? 싶을 만큼 처음 겪는 상황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 덜 힘들고 더 힘들고의 차이일 뿐이지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거기서 내가 덜 힘들기 위해서는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나의 모든 세포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맞춰져 있으니 작은 기사 하나에도 내 감정이 요동쳤던 몇 달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이렇게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모두들 힘든 중에도 버티려고 애쓰고 있는데 나는 친정집에서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는 호사를 누리고 있지 않나... 내가 2년 동안 외국에 있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책을 마음껏 사지 못해 읽지 못했던 책도 읽고, 배우고 싶었던 것을 독학을 하기도 하고, 접속이 원활하지 않아 못했던 SNS도 열심히 하며 글쓰기모임도 한 달간 참여했다.

매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하나에만 집중되었던 나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며 긍정적인 스트레스로 전환되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집중하며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새로운 소식마다 흔들리던 나의 마음을 좀 더 단단하게 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시간은 흐르고 있다. 우울하든 즐겁든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힘들어도 다들 살아내기 위해,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더 즐겁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코로나 이전의 삶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당장 다음 달의 내 미래도 예측할 수 없는 초조함에 마음이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겨내고 버텨야 한다.

시간이 흘러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오늘도 노력한다.

그렇게 지나다 보면 내 남편, 아이들 아빠가 있는 그곳에서 네 식구가 저녁을 함께 먹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소망한다.
3월 16일에 개강하여 지금까지 사이버강의와 과제가 이어지고 있다. 안그래도 들어야 할 강의와 끝내야 할 과제들이 많은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까지 대면 시험을 치룰 수 없어 과제로 대체하고 있다. 매일 녹화된 강의를, 교수님도 보이지 않는 그러한 강의를 들으며, 매주 빠짐없이 나오는 과제를 해치우다 보니 어느 새 5월이 끝나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과제들...

우리 학교는 일찍부터 대부분의 이론 수업을 1학기 전면 사이버 강의로 전환하였다. 심지어 내가 전공하고 있는 학과에서는 실험 강의까지도 비대면 강의를 이어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험 강의를 실험 없이 듣게되는 이상한 상황이 온 것이다.

현재 내가 쓰고 있는 레포트가 예비 레포트와 결과 레포트 두 종류가 있다. 예비 레포트는 실험을 하기 전 예비 조사를 하여 작성하는 것이다. 결과 레포트는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여 작성한다.

문제는 실험을 하고 써야 하는 결과 레포트를 실험도 하지 않고 써야 한다는 점이다. 숙련된 실험 조교가 찍은 실험 영상과 실험 결과를 보고 레포트를 작성해야 한다. 이게 뭔 말인가? 실험도 하지 않고 결과 레포트를 쓰라니? 학교에 낸 등록금과 학비가 안아까울 수가 없었다. 이론 강의야 그렇다 쳐도 실험 강의까지 이러려면 최소한 학비에 포함된 시설 사용료 정도는 환불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학교 측에서는 등록금 일부 환불에 대해서 논의중이라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은 하나의 실험 과목에 불과하다. 나는 이 실험 과목을 포함하여 8개의 과목을 수강하고 있는데, 과목마다 당연히 과제가 쏟아져 나온다. 기본교양은 과제가 특별히 많은 편으로, 내가 듣고 있는 글쓰기 수업에서는 매 주 1000자 분량의 글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

심화교양 과목은 조금 덜한 편이지만, 그것도 교수님마다 차이가 있다. 어떤 교수님은 한 학기를 통틀어서 한두 개의 과제를 내주시는 반면, 어떤 심화교양 과목에서는 전공과목로 착각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의 과제를 내준다. 정말 과제를 하느라 강의를 못들을 지경이다. 

내가 듣는 강의는 모두 녹화 강의이다. 보통 사이버강의를 한다면 Zoom등의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한 실시간 강의가 주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실시간 강의를 한 번밖에 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실시간 강의보다는 녹화 강의고 좋다고 생각한다. 녹화 강의는 상호소통을 하기 어렵지 않냐는 의견이 많은데, 어차피 실시간 강의에서도 학생들은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실시간 강의에서도 채팅창을 이용하지, 말로 질문이나 의견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녹화 강의에 대해서는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일종의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나같이 말을 잘 꺼내려 하지 않는 학생이라면 이렇게 하는 편이 더 마음편하다.

내가 상상했던 대학 생활은 이것이 아니었다. 집에서 강의 듣고 과제하려고 고등학교 내내 열심히 공부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OT도 가보고, MT도 가고, 친구들끼리 카페도 가고, 여행도 다녀보고 싶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지만.

그렇게 꿈꾸던 캠퍼스 라이프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공부했건만, 허무했다. 개강 초반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금은 그러려니 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없었던 것처럼 활기차게 보내고 있진 않지만, 나름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 

집에서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이유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어릴 때부터 피아노 학원을 다녔고, 지금도 피아노를 취미로 연주하고 있다. 피아노 한 악기만을 취미로 갖다 보니, 다른 악기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가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기타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주변에 기타를 치는 친구들이 유독 많았기 때문이다. 기타에도 어쿠스틱 기타, 클래식 기타,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기타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베이스 기타가 눈에 띄였다. 흔히 "이 기타는 왜 4줄이에요?" 라든지, "이 기타는 왜 소리도 잘 안나지" 등의 소리를 많이 듣는 비운의 악기지만,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베이스 기타가 내는 단순하지만 멋진, 깊고 풍부한 저음이 너무 좋았다. 통기타나 현란한 일렉 기타와는 달리 둥, 둥, 둥 비교적 간단해 보이는 연주 모습 때문에 배우기도 쉬워 보였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시가 끝나면 배워볼까?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입시 결과가 나오고, 합격 발표가 났을 때, 난 진짜로 행동에 옮겼다. 발표가 나자마자 그 다음 주에 학원을 등록하여 베이스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두 달도 채 배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들은 배우기에 충분했다. 그 배운 것들을 토대로 지금까지 유튜브 영상 등을 보면서 독학하고 있고, 실력이 조금씩 올라가는 것을 체감하면서 더 연습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베이스를 배우다 보니 이제는 통기타도 독학해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베이스 독학도 어느 정도 되었으니, 통기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중고로 기타 한 대 저렴하게 구해서 쳐봤다. 베이스를 배울 때와는 달리 손가락도 엄청 아프고, 손목도 저렸다. 아마도 통기타 줄이 더 얇아서 아픈 것일 터였다. 기타의 진입장벽이 높은 이유이다.

기타는 독학으로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악기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입문자에게 생각보다 어려운 악기이다. 피아노와는 달리 소리를 내는 것부터 쉽지 않고, 코드를 전환하는 것도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이 점을 알고, 아픈 것을 참고 매일 연습하다 보니, 손가락에도 굳은살이 생겨서 손가락의 고통은 줄었다. 코드를 잡는 속도도 빨라졌다. 통기타에도 점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베이스와는 색다른 연주감이 있었다.

앰프를 아파트에서 사용할 수 없으니, 둥둥거리는 베이스 기타의 본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다른 악기 없이 베이스만 연주하는 것은 솔직히 크게 재미가 있지는 않다. 대신 통기타는 소리도 잘 들리고, 기타 하나의 악기만 가지고도 충분히 노래를 표현할 수 있으니 더 재미있었다. 
 
 
지금은 베이스 기타와 통기타 번갈아가며 연습하고 있다.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각보다 즐겁다.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조금씩 느는 실력을 보면 마냥 뿌듯하다. 내가 집에만 있어도 즐거운 이유이다. 비록 다른 사람과 만날 순 없어도, 친구들과 만나 놀거나 대화를 할 순 없어도 말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새로운 취미를 만드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다룰 수 있는 악기가 피아노, 단 하나에서 피아노, 베이스, 기타 세 개가 되었으니 그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말 멋진 일이었다. 만약 코로나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연습할 시간도 없어서 흐지부지해졌을 지도 모른다. 특히 나는 기숙사를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럼 연습은 커녕 기껏 구매한 악기를 손도 대보지 못했겠지.

'코로나 블루'를 이겨내는 법

어느덧 종강이 다가오고 있다. 6월 말이면 많은 대학들이 종강을 할 것이다. 교수님 얼굴도 모르고 동기들 이름도 모른 채로 말이다. 집에 있으면서 투덜대고 이 상황을 한탄하는 것보다는, 이 코로나 사태 속에서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집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오히려 이용하는 것이다. 새로운 취미를 개발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 아닌가.

시간이 없다고 계속 미뤄두었던 취미들을 이번 기회에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참에 해보고 싶었던 악기를 배워보는 것은? 배워보려다가 포기한 악기들은? 물론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참고 시간을 들이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취미로, 어쩌면 평생 취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여러분들도 한 번 도전해보길 바란다.
5월 초,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유독 표지가 눈에 들어온 책입니다. 띠지가 없었다면 그저 '표지가 예쁘네' 하며 지나쳤을 거예요. 작가 이름이나 장르 정도 스캔하고 지나갔겠지요. 그런데 띠지에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획 소설'이라고 적혀있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그 자리에 멈춰 책을 읽기 시작했고 결국 집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답답해하기도 하면서 결국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저는 80년 광주에서 태어나 5.18과 성장을 같이 한 광주의 딸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광주는 여전히 시위가 끊이지 않는 도시였습니다. 해마다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뒤덮이는 금남로 풍경은 전남 화순 출신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게 되자 6월 항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요.
 
30년 이상을 광주에서만 살았기에 잘 몰랐습니다. 5.18이 이렇게까지 잊혀진 사건일 줄은, 이렇게까지 왜곡된 내용을 믿으며 웃으며 넘기는 그냥 이야기가 될 줄은 말이에요. 광주를 떠나 이사 온 지 일곱 해. 작년 군산 책 읽는 모임 북클럽에서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결심했습니다.
 
'40주년이 되는 내년 5.18은 조용히 넘어가지 말자. 그러면 안 된다. 광주의 딸로서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
 
그랬던 결심이 바로 이 책을 계기로 소환되었습니다. 코로나19로 마음껏 광주를 누비고 다니며 소개할 수는 없기에, 슬기로운 5.18 추모를 위해 관련 도서를 수집하고 SNS에 소개했습니다. 아직도 그 시리즈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기억에서 5.18이 5.18로 끝나지 아니하고, 6월 항쟁으로 연결되는 것과 닮았습니다.
 
5월 광주와 관련된 책들을 지역서점에서 희망도서 바로대출로 빌려왔습니다.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에게 <저수지의 아이들>을 권하며 같이 찾아보니 강연회를 오신다는 바로 그 작가님이셨어요. 현수막에 소개된 책들과 강연 주제가 '우리가 모르는 조선'이었기에 전혀 연결하지 못했거든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전작주의 독서(작가의 작품을 시기별로 쭉 읽어보는 독서법)가 필요하다고요. 적어도 5.18을 이야기하는 작가님들만큼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런 작품을 쓰셨는지, 다른 작품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가님의 작품이라면 일단 믿고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식스틴>을 쓰신 권윤덕 작가님을 작품에서 만나보고 다른 작품들도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95년 첫 그림책을 시작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 한국 그림책 1세대 작가님이시지요.

한중일 공동 평화그림책 시리즈 중 하나지만, 일본에서는 유독 출판이 쉽지 않았던 <꽃할머니>를 시작으로, 제주 4.3항쟁을 다룬 <나무도장>, 5.18 당시 계엄군 손에 들려졌던 M16이 들려주는 <씩스틴>까지 아파서 애써 지우고 빠뜨렸던 역사를 찾아내 평화와 희망을 이야기해주신답니다.
 
 
<운동화비행기>를 쓰신 홍성담 화백은 '5월 화가', '5월 아들'이라 불리는 분이셨어요. <불편한 진실에 맞서 길위에 서다>에서는 동학을 시작으로 제주 4.3부터 촛불까지의 현대사를 자신만의 색채로 그려주셨고, <오월>이라는 연작판화집도 있었어요.

회화를 전공한 분이 판화를 하게 된 이유는 당시 5.18을 알리기 위해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얇게 말아 속옷에 들어가는 고무줄을 빼고 넣었는데, 계속 같은 그림을 그리기 힘들어서 판화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셨어요. 5.18 관련 그림을 원하던 당시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들을 통해 판화 그림이 전달되고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빠의 봄날>을 쓰신 박상률 작가님은 시, 소설, 청소년문학, 동화, 희곡, 에세이까지 다양한 장르를 통해 5.18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월호 역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며 작년에는 소설집 <눈동자>를 발표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전작주의 독서법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드디어 한길문고에 정명섭 작가님이 오셨습니다. 큰 아이도 사전 신청을 해서 함께 갔습니다. 소설 뿐 아니라 청소년 작품들과 동화, 에세이까지 지난 15년 작가생활 동안 80여 편을 발표하셨다니 무한한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강연회가 끝나고 사인을 받으면서 광주가 고향이라서 특히 이 작품을 잘 읽었다고 말씀드렸어요. 옆집 삼촌같은 작가님은 시원시원하게 '내 친구 가은에게'라고 아이에게 사인을 해주셨고, SNS에서도 댓글을 남겨주셨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당연히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자랑은 바로 민주화이니까요.'
 
맞습니다. 코로나19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3번의 독재를 극복했기 때문에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비록 40년 전 5.18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현재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토대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자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