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기사
신천지 신도 '31만명' 명단 확보…이틀새 10만명 늘어
정부가 신천지 측으로부터 신도 31만명의 명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틀 전 신천지가 건넨 명단보다 10만명 많은 인원이다.
'군산종주팀'이라는 산악회가 있다. 나는 재작년 1월, 추월산 산행에 처음 참가했다. 산악회 버스는 일정구간마다 정차를 해서 회원들이 탈 수 있도록 했다. 각 정류장마다의 시간도 정해져 있었다. '오케이 병원', 오전 6시 15분. 내가 버스를 탈 장소와 시간이다.
 
일요일 새벽, 아무도 없는 길을 커다란 등산 가방(산악인의 자존심은 큰 배낭이다)을 메고 걸었다. 정류장 근처에 왔지만 정확히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어둠 속에 몇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회원인가 보다 하고 가까이 가서 인사를 했다.
 
버스는 정확한 시각에 왔다.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팀장이 빈 좌석을 안내해줬다. 버스 안은 조용했다. 다른 산악회 버스를 타보면 서로 잡담을 하느라 시끌벅적하고, 처음 온 회원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게 예사인데 여긴 좀 이상했다. 나한테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했다. 가지고 온 책을 꺼내서 읽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순창에 도착했다.
 
 
등산 초입부터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40대 남자 회원 두 명이 맨 앞에 서서 러셀(눈 쌓인 산을 오를 때 선두가 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하며 길을 만들자 그 뒤로 회원들이 질서정연하게 한 줄로 걷기 시작했다.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는 듯, 조용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산에서 내려와보니 떡국이 있었다. 여성 회원 한 분이 함께 올라가지 않고 음식을 준비하신 것 같았다. 회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상(추억의 접이식 양철 밥상)을 펴고 의자(목욕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니 스툴)를 놓았다. 상 하나당 의자 5개. 배식과 상차림까지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게 돌아갔다.
 
주차장 아스팔트 위에서 뜨거운 떡국을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추위와 고단함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 30분쯤 먹었을까? 갑자기 버스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났다(이게 신호다). 그러자 모두 일어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그릇 더 먹으려고 했던 나도 엉거주춤 일어나서 돕는 시늉을 했다. 밥상은 접으면 큰 쟁반처럼 되는데, 그것을 포개어서 차에 싣고 의자와 쓰레기를 치웠다.
 
산에 다니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었을 때였다. 매주 혼자 다른 산에 가는 것이 힘들고, 경비도 많이 들어서 산악회 여러 곳을 다녀봤다. 친목이나 사교가 목적인 곳이 많아서 처음부터 너무 친밀하게 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친한 사람들끼리 야유회를 온 것처럼.
 
내가 생각할 때 야유회와 산악회는 다르다. 산에 대한 전문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곳. 적은 비용으로 목적지로 갈 수 있는 곳. 산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곳. 나보다 산에 미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산악회다. 여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 때문인지 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당당히 종주팀의 마스코트로서 산악회 중심에 있다. 버스 좌석이 누구의 지정석인지부터 산행지 안내문 배부 타임, 차량 내 쓰레기 수거 시점(군산 톨게이트를 지나면 바로 한다)까지 이제 알만큼은 안다고 할 수 있다.
 
산악회 안에 '아부지'도 있다.

한 번은 어느 선배님이 나한테 자신의 딸과 나눈 얘기를 했었다.

"내가 딸한테 왜 결혼을 안 하냐고 했어. 그랬더니 딸이 아부지는 결혼해서 뭐 좋은 게 있었냐고, 왜 결혼하라고 하냐고 하더란 말이지.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랬어. 너를 낳았지 않았냐고 말이야."
"따님한테 직접 얘기하지 그러셨어요."

이때부터 선배님은 대기업 연구실에 일한다는 딸 얘기를 자주 했다. 나를 보면 딸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뒤부터 그를 '아부지' 라고 불렀다.
 
울산 가지산을 갔을 때였다. '아부지'는 늘 '한번 해병은 죽어도 해병'이라며 군대 얘기를 많이 했는데, 울산에 사는 군대 동기가 찾아 오기로 했다고 했다. 새벽에 차에 타면서부터 친구분과의 전화 통화에, 옛 추억 얘기에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내가 물었다.

"아부지, 그 친구분 몇 년 만에 만나는 거예요?"
"십 년도 넘었지."

십 년 동안 안 만난 20대 시절의 군대 동기. 지금은 70대인 선배님이 괜히 친구분한테 무리하게 만나자고 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것도 (30분만에 먹는) 하산주 마시는 장소에 오라고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십 년 만의 조우를 양철 밥상을 두고 하게 되는 거다.
 
6시간 정도의 산행을 마치고, 산악회 버스 있는 곳으로 갔다. 버스는 (오늘따라) 외진 다리 밑에 주차돼 있었는데 어떻게 설명 하셨는지 그곳에 친구분 부부가 기다리고 계셨다. 눈물이 글썽한 채로.
 
따로 말씀 나누시라고 한 상을 차려드렸다. 옛 이야기를 얼마나 나누었을까? 어김없이 버스 시동이 걸리자 그들은 일어서야 했고, 아부지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먼저 차에 올라 타 버렸다. 남겨진 친구분한테 (딸로서)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분은 "저 친구와 군대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을 넘겼는지 모른다"며 눈물을 훔치셨다. 그걸 보고 차에 올라 타니 아부지도 눈이 벌겋게 되어서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식지 않을 만큼 뜨거운 감정이란 뭘까 생각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진정이 된 아부지가 (예의 천진난만함으로) 친구와의 추억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친구분이 해병대에서 아부지하고 죽을 고비 많이 넘겼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랬지. 저 친구하고 나하고 사건이 많았지."
"그런데 그때 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죽을 뻔했어요? 대구에 계시는 진짜 아부지는 월남전에 참전했어도 군대 얘기 잘 안 하시는데."
 
그 순간 폭소가 터졌고, 조용하던 버스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모두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나 보다. 아부지는 멋쩍어하더니 육군 무슨 부대냐며 화제를 돌렸다.
 
사람을 떠나고 싶어서 산으로 갔었다. 야유회와 산악회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3년 전 나는 사람을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지금은 조금은 달라진 나를 느낀다. 그것이 사람 때문인지, 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친구가 자신의 초등학교 3학년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했다. 요즘엔 워낙 다들 빠르다고 하니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그런데도 놀랍긴 했다. 초등학생도 '남친', '여친'을 만들고 다닌다니. 아이들에게 '그런 감정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니' 하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친구 아들에 비해 나는 정말 '이런 방면'으로 정말 느렸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내 마음을 빼앗아간 '오빠들'은 모두 텔레비전 속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농구를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오빠를 보기 위해 직접 찾아가야 했으나, 당연히 그들과 말 한마디 나누거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얼굴 맞대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 애가 바로 '스무 살에 만난 대학 동기 Y'였다. 

친구들은 왜 '가끔' 다정한 남자에게 빠진 걸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망가지는지) 나는 친구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대학에서 만난 여자 친구들은 화사한 청춘의 날개를 달자마자 차례대로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편의상 내 친구들을 A, B, C, D로 부르겠다. 

가장 먼저 A는 자신과 같은 동아리에 있는 남자애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엔 그냥 캠퍼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흔한 공대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남자애인데, A는 그 아이가 정말 좋다고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딘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A는 그 남자애가 똑똑하고 또 가끔은 다정해서 좋다고 했다. 
 
 
다음엔 B가 옆 동아리 남자아이에게 홀딱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남자애 역시 까무잡잡한 피부에 무뚝뚝한 표정이 꼭 A가 좋아했던 그 남자애 같기만 했다. B 역시 A와 비슷한 이유로 그 남자애에게 빠진 듯했다. 똑똑하며 또 가끔은 친절하게 군다나. 왜 내 친구들은 가끔만 다정하거나 친절한 남자에게 빠지는 걸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마음이 설레는 건 찰나다. 도리어 상대를 하염없이 떠올리느라 바보 같아지거나 아니면 그와 나와의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슬퍼해야 한다. 나는 이미 A를 통해 알고 있었고, B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그 애는 나를 동아리 '친구 15'쯤으로 생각할 때의 심정이란. 
 
B는 결국 고백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B를 어찌나 뜯어말리고 싶던지. 그 애가 친구를 좋아하는 눈치라곤 없는데 무턱대고 고백을 해버린다니. 하지만 B는 내 생각과 다른 듯했다. 우선 이쪽에서 마음을 표현해야 그 애도 자기의 마음을 따져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B가 고백하기 며칠 전부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백을 해야 좋을지 의논했다. 하지만 B는 저도 모르게 그냥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충동적인 방식으로 고백을 해버리고 말았다. 둘이 자주 마주치던 동아리 방 근처 복도에서. B는 차였다. 우리 A부터 E(나)까지는 한동안 B를 위로해주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위장에 술을 쏟아부어야 했다.
 
스무 살, 아무 이유 없이 사랑에 빠지다

우리는 그해 내내 똘똘 뭉쳐 다녔다. 어느 정도였냐면, 수업을 듣다가 A와 E(나)가 몸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문을 가리키면 B와 C 그리고 D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준비가 끝난 걸 확인하면 나쁜 학생 다섯 명은 마치 당구공이 하나씩 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듯 문을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가끔은 F, G 등 남자친구들도 우리를 따라 나오곤 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주로 피시방, 포켓볼장, 보드 게임방이었다. '가끔' 술집에 가기도 했는데, 앞에다 '가끔'을 붙인 이유는 낮부터 술을 마시는 걸 자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낮부터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E(나)가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E가 자주 슬퍼졌기 때문이다. 

A와 B는 지난 사랑에서 벌써 깔끔히 벗어난 상태였고, C는 우리 중 처음으로 보란 듯이 연애를 하고 있었다. D는 눈에 띄는 누군가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D는 2학년이 된 후 후배와 짧게 연애를 했다. 그러나 그 연애 끝에 D는 자신이 연애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아는 사람 중 최초로 '비혼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전부터 아무 이유 없이 Y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어느 날은 의문이 들었고(내가 걔를 왜 좋아하지? 걔는 내 스타일이 정말 아닌데), 어느 날은 그 애가 너무 보고 싶었고(보면 뭐해, 걔가 나한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은 괜히 그 애를 괴롭히고 싶었다(초딩때도 안 하던 짓을 이제 와서?). Y는 말랐다는 점을 제외하곤 정말 내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Y처럼 착하기만 한 사람, 그래서 사람들한테 맨날 놀림을 받는 사람, 기분 나쁜 티는 내지 않고 헤헤 웃어버리는 사람들을 바보 같다고 싫어했다. Y 옆에 앉아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면 그가 하는 말이라곤 "에이, 왜 그러세요"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누가 놀리면 큰 눈을 끔벅이며(나는 눈이 큰 남자도 싫어했다) 웃는 게 전부였다.
 
폐인처럼 살고 있는 듯해 그 점도 마음에 안 들었다. 아침에 그를 보면 피곤해 보일 때가 많았다. '어제 뭐 했냐'고 물으면 "밤새 술을 마셨다거나 피시방에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Y를 좋아하고부터 Y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물어 찾아다니곤 했는데, 그는 자주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당구를 치고 있었다. (나는 담배 냄새도 무지 싫어한다).
 
싫은 것 투성이인 이 애가 왜 좋을까. 나도 내가 이상해서 자주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 끝에 이런 결론에 다다르곤 했다. 
 
"Y는 착해서 좋아."

착한 건 싫은데, Y는 착해서 좋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을 수 있나.

Y가 착한 건 A, B, C, D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우리는 Y가 화를 내거나 욕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상대의 장난이 심할 경우 약간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 봤자 Y가 하는 소리라곤 "그만 해요"가 전부였다. Y 곁에 있을 때면 '저렇게 착해 빠져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Y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일쑤였다.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게 된 남자애의 얼굴을. 

나는 Y와 친하지는 않았다. 애가 수줍음을 타고 착하다 보니까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그 시절 나와 친했던 남자애들은 다 나처럼 까칠했고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또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애들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통해 Y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 Y가 소개팅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A부터 D까지 불러 모아 술을 마시며 절절히 슬퍼했다. 그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 마음 아프고 슬픈 일이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으며.
  
그래서 그 아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B처럼 고백 한 번 해봤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스무 살의 나는 Y를 좋아했으면서 고백할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누가 좋아지면 그냥 계속 혼자 좋아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미 나는 텔레비전 속 오빠들을 '사귀고자 하는 마음 없이' 몇 년 동안 혼자 좋아했던 전력이 있었기에, 눈앞에 있는 Y를 향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고백했다가 차일까 봐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다른 아이들보다 늦되서였다. 당시 나는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스무 살의 내게 연애는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벌어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나 닥치는 그런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상상이 되지도 않았다. 

'사귀면 뭘 해야 하지?' 
'누군가와 사귄다는 건 아무래도 좀 어색한 일이지 않을까?'

 
그때 Y 역시 나를 좋아했다면, 그래서 Y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러면 Y를 피해 다녔을 것이다. 고백했다면 거절했을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았는데 그 고백을 거절한다고?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나에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몸과 다르게 마음이 하는 일은 자주 불가해하고 아리송하며 애매하니까.

실제 3년 뒤 한 남자가 내게 적극적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그 남자를 치한 물리치듯 물리쳤다가, 나중엔 내가 더 좋아해서 사귀게 됐다.
  
 
Y를 좋아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석 달 정도 좋아하고 말았다. 그 애를 생각하며 많은 술을 마셨고, 덕분에 살도 착실히 찌웠다. 어느 순간 Y를 봐도 더는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조금 서운해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로도 나는 계속 Y를 좋아했다. 모두에게 부드럽고 스무 살 남자치곤 참으로 고요했던 친구로서의 Y를.

지금 생각해보면 Y는 나를 보며 늘 웃었다. 수줍으면서도 친절한 웃음이었다. 날 보며 언제나 웃어주는 그 모습이 참 좋았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나는 그 애가 웃는 게 좋아서, 그 애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 그래서 그 애를 좋아했던 것 같다.
 
   누가 나를, 내 속창아리를
   여기 이렇게, 뻘겋게, 시뻘겋게
   마구 토해 놓았나,
   함부로 뒤집어 엎어버린 채!
         -이은봉 디카시 <영산홍 꽃무더기>

 
영산홍은 지금은 한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지만 본래는 일본에서 자생하는 꽃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이 꽃나무는 세종 때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는 "세종 23년(1441) 봄, 일본에서 일본철쭉 두어 분을 조공으로 보내왔다. 대궐 안에 심어두고 보았는데, 꽃이 무척 아름다웠다. 일본철쭉은 중국의 최고 미인 서시(西施)와 같고, 다른 철쭉은 못생긴 여자의 대표인 모모(嫫母)와 같다"라고 기록돼 있다 한다.
 
조선초부터 영산홍으로 불리었는데, 조선 중후기로 오면서는 선비들도 즐기는 꽃으로 알려지며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라는 것이다. 지금은 정원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 영산홍이다. 영산홍 꽃은 깔때기 모양으로 위쪽이 다섯 개로 갈라져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은봉 시인은 흐드러지게 핀 영산홍 꽃무더기를, 속창아리를 벌겋게 시뻘겋게 마구 토해 놓았다라고, 그것도 함부로 뒤집어 엎어버리 채라고 일갈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속창아리는 속창자의 사투리이다. "그것들이 잘났다고 나서는 꼴을 보면 나는 속창아리가 뒤집힐 지경이다."라는 용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속이 뒤집어진다라는 말은 단순히 기분이 나쁜 정도를 넘어서 열불이 나는 상태이다. 시쳇말로 머리 뚜껑이 열리다는 의미이다.
 
한편 "속창아리가 없다", "속창아리가 빠졌다"라는 말도 있다. 조정래의 <아리랑>에 나오는 "장사해 묵자면 속창아리럴 다 빼놔야 헌다는 말도 있제만 그려도 농사꾼덜언 배곯코 살아도 장사꾼덜언 다 하로 세 끄니 찾아묵고 사는 법 아니여."에서도 확인되듯이 살아가지면 자기 생각대로 살 수 없음을 일컫는 의미다. 이 디카시에서는 결과적으로 속창아리가 빠진 형국이기도 하다. 어떻게 속창아리를 읽든 이은봉 시인은 디카시 <영산홍 꽃무더기>에서 '속이 뒤집어진다' 혹은 '속창아리가 빠졌다라'는 관습화된 말을 빛나는 비유로 새롭게 빚어 놓았다.
 
시인 셀리가 "시인의 말은 결정적으로 비유적이다"라고 말한 것은 관습화된 굳어진 의미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역할을 시인이 해내기 때문이다. 연산홍 꽃무더기를 속창아리에 비유함으로써 사사로운 개인 감정을 넘어서 오늘의 불의한 세태에 대해 불 같은 질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디카시의 속창아리가 화자 개인이 아닌 오늘의 한국사회의 속창아리가 뒤집어짐 혹은 없음의 환유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은 영상홍 꽃무더기라는 집단성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바른 눈으로 오늘의 세태를 응시할 때 누군들 속이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이무튼 순간의 메타포가 빛나는 디카시다.
 
두 달 전 나는 대구 달서구의 시장 초입에 작은 책방을 열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좋아하는 책을 주민들과 나눠보고 싶어서였다. 2월에 접어들면서 유리창 밖 행인들이 하나둘 마스크를 끼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진 환자가 국내 다른 지역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며칠 안 돼 마스크 안 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지난 18일 대구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나왔다. 다음 날부터 확진 사례가 대구에서 가파르게 늘고 있다는 뉴스 보도가 쏟아졌다. 시장을 찾는 사람이 줄면서 책방 손님도 줄었다. 끼니 때면 붐비던 근처 국수 가게에도 발길이 끊겼는지 사장님 혼자 뉴스를 보고 계셨다.

문 닫기 전, 손님이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구에서 첫 확진자가 나온 지 이틀 뒤인 20일, 나는 책장과 화장실 청소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보건당국에서 소독약을 구하지 못해 급한 대로 세제를 풀어 구석구석 닦고 쓰레기를 비웠다. 곧 커피 원두가 떨어질 테지만 주문을 넣지 않았다. 시장 상인 누구도 말하진 않았지만 한동안 가게 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닫기 전, 손님 한 분이 책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수건과 마스크를 덧대 이중으로 얼굴을 감싼 중년 여성이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을 만한 책이 있을까요? 희망을 얻을 만한 책이요."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한 경력이 있다는 여성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마음의 위로를 찾고 싶다고 했다.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읽어보세요."

 

나는 시리아 내전 중 수천 권의 책을 모아 종이로 된 요새를 구축해 마음을 지킨 다라야 사람들의 이야기를 권했다. 여성의 눈가에 익숙한 주름이 잡혔다. 마스크 낀 사람들은 눈으로 말하고 웃는다.
 
손님이 나간 뒤 화분에 물을 듬뿍 주고 책방 문을 걸어 잠갔다. 시장을 지나쳐 걷는데 자리를 지키는 상인들이 보였다. 금방 상하고 마는 생선, 과일을 파는 상인들은 쉽게 시장을 떠나지 못했다. 

시장 골목에 활기가 넘치는 날을 기다리며
 
저녁 무렵 집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졌다. 갑자기 확진자 수가 늘면서 생필품 수급에 대한 가짜뉴스가 퍼졌는지 생필품 사재기가 시작된 것이다. '낮에 동네 마트 두 군데에서 라면조차 구할 수 없었다'는 엄마의 얼굴이 어두웠다. 설마 싶어 슈퍼마켓에 갔더니 카레, 라면, 즉석밥 진열대가 텅 비어 있었다. 일회용 마스크는 이미 동난 지 오래라고 했다.
 
곧 일터로 향하지 않는 생활에 적응했다. 늦잠 잔 뒤 정부 부처의 브리핑을 통해 확진자 수를 확인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했다. 휴관한 동네 도서관과 스포츠센터를 이용하지 못하니 마스크를 끼고 인적 드문 길을 산책하는 일이 거의 유일한 야외활동이었다.
 
대구시에서 외출을 삼가 달라는 요청을 발표한 지난 23일 이후로는 아파트 인근에서 사람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슈퍼마켓 진열대는 여전히 평소보다 비어 있고, 필요한 물품을 집안으로 들인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요새를 구축한 채 바이러스가 퇴치될 때까지 나오지 않을 태세다.
    
 
25일 오후 4시 기준 전국 확진자 수는 977명, 그중 대구에 거주하는 확진자는 543명이다. 그나마 전날보다 증가 폭이 줄어 다행이다. 24일에는 하루 사이에 231명이 늘었는데 이날은 전날 같은 시각 집계보다 144명 추가 발생했다.
 
책방이 임시휴업한 지 어느덧 닷새째다. 언제까지 가게를 닫아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사태가 장기적으로 이어지면 월세는 어떻게 내나 싶다. 한국휴게음식점중앙회 대구지회에서 특별보증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막상 소상공업에 종사하고 보니 보건 재난이 건강만 위협하는 게 아니라 지역민의 경제권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급한 대로 면 마스크를 삶아 쓰는 법을 익히고 있으며, 대구 시민들과 의료진을 응원하는 온라인 해시태그 운동에도 동참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어 다시 시장 골목에 활기가 넘치는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봄이 오면 책방 밖에 화분을 내놓으며 마스크 없이 지역민들과 활짝 웃고 인사 나누었으면 좋겠다.
 
     
영화 <별들의 고향>이 극장에 걸렸을 때 내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스무 살에는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았다.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얼마나 처절하게 훼손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영화 두 편이, 모두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만 같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뜨겁게 가슴을 두들긴다.
 
꿈도 희망도 그 무엇도 없이 숨이나 쉬던 시기에 나는 회현동과 필동이 섞이는, 남산 케이블카가 어렴풋이 보이는 볼링장에서 핀세터 일을 하고 있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정강이가 으깨지고 머리통이 날아가기 십상인 위험한 일이었지만 월급 같은 것은 없었다. 고객이 '팁'이라는 명분으로 볼링공 구멍에 동전을 넣어서 굴려주면 그걸로 먹고사는 희한한 직업이었다.
 
그때까지 내 인생은 온통 희한하고 괴상하고 신기한 '탈선의 연속'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을 안 외웠다고 무자비하게 때리는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도 희한한 종자였고, 선생님이고 뭐고 그냥 확 들이받아 버리고 싶었어도 감히 그렇게는 못 하고 학교를 그만둬버린 나 자신도 지금 생각하면 괴상한 인간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도 뛰쳐나온 이후 나는 극장 영사실을 시작으로 이발소, 공장, 룸살롱 등에서 열 개도 넘는 일을 했지만 스무 살 나이에 이르도록 한 번도 인건비 같은 것은 받아보질 못했으니 그 또한 시시하거나 범상한 경험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내 생각이 짧고 눈이 먼 탓이었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월수 얼마 보장'이라는 문장이 어쩌면 나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놓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여겨지던지, 신기하게도 나는 매번 당하면서도 월수 얼마 보장이라는 전단지만 보면 신심이 두터운 종교인처럼 확 믿어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굶어죽지 않고, 맞아죽지도 않고 살아서 나이 스무 살에 사글세방을 얻어놓고 자취생 노릇까지 하고 있었으니 그럭저럭 성공한 인생이기는 했다. 적어도 월세 보증금조차 없어서 허덕거리는 청춘은 아니었던 것이다.

월세를 제때 못 내면 쫓아낼 수도 있다는 집주인 협박이야 '뭐 그렇다고 죽기야 하겠어?' 하는 정도의 자문자답 한 번이면 대충 뭉개고 버틸 정도의 객기가 있었다. '간덩이'가 부어오른 자만이 갖출 수 있는 배짱이 어느새 생겨나 있었다.
  
간덩이가 잘못 부어올랐다면 필경 뒷골목 양아치나 조폭 똘마니의 길을 걸었겠지만, 그놈의 국민교육헌장 사건 탓이었는지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쪽으로는 머리가 영 안 돌아갔으며,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도 모범적인 나를 향해 '도적이 되어야 한다'고 속삭인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영화 <별들의 고향>이요 <영자의 전성시대>였다.
  
'후안무치의 달인'에게 우리는 늘 주눅 들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는 내게 있어 그냥 재미있는 구경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서워도 재미있고, 슬퍼도 재미있고, 웃겨도 재미있는 요상하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바로 '영화'였다.
 
돈이 생기면 극장으로 달려가서 청춘을 탕진했으나, 극장을 나오면 무슨 영화를 봤는지조차 잊어버리곤 했다. 그런데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는 가슴을 파고드는 울림이 영 달랐다. 그 두 편의 영화는 등장인물 모두가 서울에 와서 시내버스 '안내양'을 하거나 식모를 살거나 중국집 '뽀이'(보이, Boy)를 하는 내 고향의 누이와 형들을 연상케 하며, 내 뼛속까지 들어와 오랜 시간 나를 고문했다.
 
'이게 뭐지? 우리도 결국은 저렇게 죽어나가는 것인가?'
   
내 생애 처음으로 해보는 심각한 의문이었다. 오랜 시간 괴로웠다. 날마다 슬펐다. 딱히 무슨 이유도 없이 억울하기도 했다. 그때 눈에 띈 것이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과 그 집 주인 '아줌마'의 돈벌이 방식이었다.

그 집은 일본식 이층 목조주택으로 전후좌우 빙 둘러 연탄아궁이만 뚫린 셋방이 열세 개였다. 담이 없는데도 육중한 담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넓이가 이 미터도 채 안 되는 대문 위에까지 콘크리트를 쳐서 창고를 만들어놓은 까닭에 안에서 봐도, 밖에서 봐도 늘 숨이 막히는 희한한 집이었다. 

열세 개의 방 중 열한 개는 이른바 '아가씨'들이 세 들어 살았다. 나머지 둘 중 하나는 내가 살았고, 다른 하나는 젖먹이 아이가 딸린 부부가 그 작은 방에서 살고 있었다. 낮에는 잠을 자거나 집 주인과 화투를 치고, 해가 질 무렵이면 출근했기에 나는 아가씨들의 직업이 뭐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열일곱 나이에 월수 얼마 보장이라는 전봇대 전단지를 보고 찾아간 곳이 룸살롱이었고, 웨이터보조라는 직함을 달고 다섯 달 남짓 있는 동안 돈벌이는커녕 손님들이 먹다 남긴 안주나 술로 겨우 배를 채워야만 했던 나로서는, 그 아가씨들의 직업을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게 돼 있었다.
 
아가씨들은 일명 '호스티스'였다. 출근과 동시에 '멤버'라는 자에게 출근비 명목의 현금을 지불해야 하는 괴상한 직업이었다. 만약 그날 돈이 없어서 출근비를 못 내면 멤버는 그녀들을 룸에 넣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달러돈을 내서라도 출근비는 반드시 지참하고 출근을 해야 했다. 룸에 들어갈 차례가 돌아오면 영업부장이 다가와서 한 마디 위협적으로 속삭인다. '손님 몰래 술을 마구 버려야지 안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패널티를 준다'고.
  
룸살롱의 위계질서는 조폭 세계와 비슷했기에 그녀들의 손님 몰래 술 버리는 기술은 정말 뛰어났다. 그렇다고 백 퍼센트 완벽한 것은 아니어서 가끔은 손님들 손에 죽도록 얻어맞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시 룸살롱 호스티스란, 돈은 돈대로 뜯기고, 덤으로 얻어맞는 게 의무인 직업이었다. 그런 그녀들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 주인아줌마한테도 뜯김을 당하고 있었다.
 
큰아들이 고속도로 순찰대를 나가는 경찰관인 까닭에 날마다 현금이 얼마씩 들어온다는 자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올리던 주인아줌마는 일수놀이의 달인이었고, 민화투건 육백이건 고스톱이건 쳤다 하면 돈을 따는 화투치기의 달인이었다. 전기료와 수도료를 자기네는 식구가 다섯에 냉장고며 세탁기며 온갖 가전제품을 사용하면서도 무조건 가구당 얼마 하는 식으로 분배해 뜯어먹는 후안무치의 달인이기도 했다.
 
세입자들이 뭘 몰라서, 바보라서 당하는 건 아니었다. 알지만 더러워서 당해주는 것일 뿐이었다. 더러움의 주인공은 역시 '돈'이었다. 세입자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주인아줌마에게 빚을 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설령 지금 당장은 빚이 없다 해도 이제 곧 빚을 지게 돼 있었다. 그 누구도 정해진 날짜에 월세를 정확히 낼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쩔 것인가.
 
특히 아가씨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일수를 찍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녀들은 돈 쓸데가 엄청나게 많았다. 누구는 고향의 부모님 약값으로, 누구는 도망 중인 오빠의 도피 자금으로, 또 누구는 동생들 학비로, 각종 기타 명목으로 그녀들은 항상 돈에 쫓기고 있었고 습관적으로 일수놀이의 달인 주인아줌마에게 손을 벌렸다.
 
주인아줌마는 일수놀이의 달인답게 십 만원이 넘는 돈을 빌려주는 법이 없었다. 큰돈을 주었다가 야반도주라도 하면 머리 아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오 만원 아니면 십 만원이었다. 오 만원은 하루에 오천 원씩 열다섯 번을 찍어야 하고, 십 만원은 역시 하루에 오천 원씩 서른 번을 찍는데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비싼 이자였다. 그나마도 미운털이 박히면 빌릴 수조차 없다.
 
미운털이란 이를테면 전기료나 수도요금 같은 '하찮은 일'로 따진다거나, 화투를 치자고 오라 했는데 아프다고 안 온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때문에 아가씨들은 오늘은 나, 내일은 너 하는 식으로 최소한 사흘에 한 번씩은 교대로 주인아줌마와 화투를 쳐서 돈을 잃어줘야 했고, 점심 때가 되면 점심을 사줘야 했고, 탕수육이건 통닭이건 느닷없이 먹고 싶어 죽겠다고 하면 각자 얼마씩 추렴해서 먹여줘야만 했다.
  
그런 호랑말코 같은 장면들을 무수하게 보면서도 나는 속으로나 침을 뱉을 뿐이었고, 어떻게든 해보자는 생각 같은 것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영화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고 나서 간덩이가 터질 정도로 커져버렸던 것인지 뜬금없는 생각에 빠져드는 시간이 잦아지고 있었다.

'아들은 교통경찰관으로 날마다 밖에서 운전기사들한테 삥을 뜯어오고, 어미는 그 돈으로 일수놀이를 해서 돈을 가마니에 그냥 쓸어 담는구나.'

그런 너절한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우울하고 슬프고 괴로웠다. 그 바람에 굴러오는 볼링공을 제때 피하지 못 해서 정강이가 으깨질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내가 이상해 보였던지 함께 일하는 또래의 사내녀석이 아는 체를 해 왔다. 나는 있는 그대로를 다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단 일 초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즉각 "너 그 돈을 어디에 두는지 알지?"라고 했다.

정의로운 도적이 되고 싶었다
  
 
'돈을 어디에 두는지 아느냐'는 질문 한 마디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길이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은 히죽 웃고 있었고, 나는 바싹 긴장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월세를 열흘 이상 밀리면 일수라도 찍어서 내라고 소리소리 질러대는 주인아줌마 덕분에 돈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커다란 봉황새 두 마리가 날개를 펴고 있는 자개농 문을 열면 또 하나의 작은 농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금고'였다. 그 안에는 돈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번이라도 일수를 찍은 사람이라면 본적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지장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나의 인적사항이 착실하게 보관돼 있는 셈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그날부터 차근차근 연구해 나갔다. 덮어놓고 한밤중에 망치 같은 것으로 문고리를 따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선 우리가 왜 그 돈을 꺼내고자 하는지, 꺼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오랜 시간 토론을 벌였다. 꺼낸 돈의 액수가 얼마이건 무조건 3분의 2는 불쌍한 아가씨들에게 분배한다는 대원칙은 쉽게 끌어낼 수 있었지만, 분배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는 쉽지가 않았다. 아가씨가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도 넘는데 돈 보따리를 들고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찾아낸 방법이 아가씨들의 출근 시간에 골목에서 기다렸다가 전해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정의로운 도적'을 꿈꾸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잠도 안 오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히죽히죽 웃음이 나오는 은밀하게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헤쳐나가야 할 길은 아직 멀기만 했다. '언제 어떻게 거사를 도모할 것인가' 하는 가장 큰 문제가 호랑이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선 경찰관 아들의 출근과 퇴근 시간을 면밀히 관찰해 통계를 내고자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어떤 날은 초저녁에 출근해 새벽에 퇴근하고, 다음 날은 아예 안 나가버리고, 그다음 날은 아침에 출근해서 밤늦게 돌아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가 없어서 당황하고 또 당황하는 동안 세월은 척척 잘도 흐르고 있었고, 작전계획은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았건만 세월은 어느새 석 달이나 지나 있었고, 우리는 슬슬 딴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아무리 교통이라지만 그래도 경찰관인데 안 잡힌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러는 동안 우리는 차츰 다른 것을 보고,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우리가 도모하는 도적질은 정당해 보였다. 정당해 보이면서도 나쁜 짓이라 생각했다. 뭔가 굉장히 어긋나 있었다. 이게 뭐지? 뭐가 문제지?
 
갈등과 고민은 계속되었고 우리의 의욕은 팍팍 꺾여나갔다. 좀 더 다른 차원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때 구체적으로 했나 여부는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로부터 얼마 뒤 나는 정의로운 도적에 대한 꿈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점집이 수도 없이 늘어선 미아리고개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오마이뉴스>를 알게 된 것은 2003년이다.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통령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후, 나는 국민을 대상으로 한 취임식 참가자에 당첨돼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국회에 갔다. 대통령 취임식 현장 여정을 기사로 써서 <오마이뉴스>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을 다녀온 다음 날, 수첩에 꼼꼼히 메모한 글을 바탕으로 취임식 여정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 기사를 써보는 것이어서 4~5시간은 족히 걸린 듯하다. 기사를 넘긴 후 이튿날, 혹시나 하고 <오마이뉴스>를 보니 사진기자들이 찍은 취임식 현장의 멋진 사진들과 함께 내 기사가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상상도 못 할 기쁨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다. '내 기사가 메인화면에 딱 걸리다니!' 아버지는 당시 내 기사를 출력해 보관해놨는데 그 자료가 지금도 남아있다. 첫 기사 사연은 추후 다시 한번 기사로 작성했는데 그 에피소드는 오연호 대표가 2004년 8월에 발행한 책 <대한민국 특산품 오마이뉴스>에도 실렸다. 
 
      
첫 기사에서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이후 몇 차례 기사를 더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3년 시민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컴퓨터를 켜면 하루 종일 <오마이뉴스>를 보면서 글을 배우고 기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기 시작했다. 시민기자의 다양한 글이 메인에 오를 때마다 남모를 질투감과 부러움은 승부욕을 자극했다.

나는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사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여행 기사도 쓰고, 태풍 매미 현장도 다니고, 서평과 영화 이야기도 썼다. 하지만 기사는 좀처럼 메인을 장식하지 못했다.

워낙 쟁쟁한 시민기자들이 많았고, 스트레이트 기사가 뭔지 모르는 나로서는 '사는 이야기' 위주의 기사 쓰기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성스럽게 쓴 글이 번번이 생나무가 되면 실망감과 함께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시민기자에서 직업기자로
 
 
좌절된 분위기를 한 단계 끌어올려 준 계기는 '오연호의 기자만들기' 시민기자 연수였다. 2003년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경기도 성남에서 열린 시민기자 연수에 참가했는데 '취재론'에서 '사회진출론'까지 14개의 강연과 기사 작성 실습, 분반 토론 등이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연수에서는 특히 김은혜 MBC 기자, 손석춘 한겨레 논설위원, 양기대 동아일보 사회부 차장 등 현직 기자들이 전하는 '기자의 세계' 강연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 연수 과정을 수료해 '오연호의 기자만들기' 18기가 되었고 당시 연수 자료집은 훗날 내가 후배들에게 기사를 가르치는 훌륭한 교재로 지금도 활용하고 있다.

이후 <오마이뉴스> 기자클럽에 가입하면서 좀 더 깊은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당시 <오마이뉴스>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시민기자를 대상으로 기자클럽을 운영했는데 나는 사회부에 선정돼 좀 더 깊은 취재를 할 수 있게 됐다.
 
     
2003년 기자클럽에 선정되면서 받은 기자증과 명함 한 장이 지금도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기자증 앞에는 'PRESS'와 'OhmyNews' 로고, 그리고 지금 외모와는 비교할 수 없는 청춘과 열정으로 가득한 20여 년 전 내 사진이 담겨있다. 기자증 뒤에는 소속, 이름, 주민번호, 유효기간 등이 쓰여 있는데 2003년 10월 19일부터 2004년 4월 18일까지 6개월 동안의 활동기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자클럽에서 끝까지 활동하지 못했다. 다음 해인 2004년 1월 지역 일간지가 창간하면서 기자로 채용됐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에서 1년 동안 열심히 활동한 나는 그 경력을 인정받아 다음해 신입 기자가 아닌 경력 기자로 채용됐다. 그곳에서 1년 동안 활동한 후 2005년부터는 지역신문에 근무하면서 취재부장-편집국장을 거쳐 2018년을 끝으로 지역신문 기자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2019년 다시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렸다가 지난해 하반기 아주 작은 인터넷신문을 창간하며 다시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인터넷신문 창간으로 잠시 <오마이뉴스>를 쉬고 있지만, 조금 자리를 잡으면 다시 <오마이뉴스>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인연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
 
   
약 20여년 전, 기사가 뭔지 기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할 때보다, 현재 기자로 활동하면서 글쓰기에 더욱더 한계를 느낀다. 과거 시민기자 시절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뉴스였다. 그래서 다양한 방면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

20여 년 전에 썼던 <오마이뉴스> 기사는 세련미는 없을지라도 소재가 다양하고 형식에 치우치지 않아 참신했다. 하지만 지난해 <오마이뉴스>에 다시 돌아와 쓴 기사들은 십중팔구 스트레이트 위주고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 위주의 기사일 뿐, 독창성은 찾을 수 없다.  
     
20년 가까이 기자를 직업으로 살아보니 사고방식이 '뉴스'라는 프레임에 갇혀버린 것이다. 행정 위주의 소식이 눈에 먼저 들어오고, 뉴스메이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사건·사고 등 전형적인 뉴스의 틀에 갇혀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 '이런 것은 뉴스가 안 돼!'라는 자기 검열이 창의력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장애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요즘에는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것이 두렵다. 시민기자들의 수준과 전문성도 20년 전보다 훨씬 더 높아진 데다 내가 쓰는 글 역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마이뉴스>와 인연은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내 청춘의 열정이 스며들어 있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기자를 할 수 있었고 후배들을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갓 서른, <오마이뉴스>를 접한 내 청춘은 어느새 마흔 중반을 훌쩍 넘었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오마이뉴스>와의 인연을 하나둘씩 펼쳐보면서 나는 오늘 다시 한번 뜨거웠던 20여 년 전 청춘을 소환하고 있다.

앞으로 10, 20년 후 <오마이뉴스> 창간 30, 40주년에는 어떤 에피소드로 글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 스무 살이 된 <오마이뉴스>와의 인연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직장의 풍경

출근하는데 회사 현관 앞에 사람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처음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회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하나이므로 나도 줄을 섰다. 보안 검색대가 고장 난 줄 알았다.

대기줄이 줄어들면서 보인 것은 열감지 카메라였다. 보안검색대만 통과하면 됐던 평소와 달리 열감지 카메라 앞에서 3초 정도 서 있다가 들어가야 했다. 평소 사무실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2, 3분 더 지체됐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모두의 안전을 위한 일이므로.
 
지난주, 신입 직원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열이 난다고 했다.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병원에서 단순 몸살감기라고 했단다. 직원은 약을 처방받고, 다시 회사로 출근하겠다고 했다. 그냥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로 의심했다기보다는 아프니 쉬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후에 회사에서 지침이 내려왔다. 발열이 있는 사람은 단순 감기라도 보고를 하라고. 그 직원은 최초의 발열이 있는 자로 보고됐다. 다행히 약을 먹고 오후에 열은 내렸다. 단순 감기였으므로 당연했다. 다음날 출근이 가능했지만, 회사에서는 사흘간 강제로 쉬게 했다.
 
코로나19가 급속히 퍼지면서 회사의 업무 풍경도 달라졌다. 최근 2주간 대구나 경북 지역을 다녀온 사람은 재택근무를 하게 했고, 회의보다는 서면이나 메일로 보고를 대체했다. 층간 이동이 금지됐고, 한 달에 한 번 하던 회식도 없어졌다. 회사에서는 마스크를 나누어줬고, 마스크를 쓰고 일하라고 권장했다. 손소독제 비치는 기본이었다.

이외에도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위해 계획을 수립했다. 나는 공공기관에서 24시간 운영하는 시스템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비상 시 어떻게 할 것인지 대비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보통 비상계획은 화재나 지진에 대비하는 것이었는데, 전염병 때문에 비상대책을 세우게 될 줄 몰랐다.
 
생활의 풍경
 
 
큰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주 2회 영어과외가 유일하게 하는 사교육인데, 담당 선생님이 수업하는 다른 지역에서 지난 23일 확진자가 나왔다. 다행히 확진자 동선과 겹치는 부분은 없었지만, 서로 불안해 결국 수업을 연기하기로 했다. 그날 정부는 전국 초·중·고 등의 2020학년도 개학을 다음 달 2일에서 9일로 일주일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연이어 축구교실에서도, 태권도 학원에서도 모두 휴원 통보를 받았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는데, 실내가 텅텅 비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주말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비던 어린이 도서관은 사서와 자원봉사자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늘 만차이던 도서관 주차장도 여유가 있었다. 반대로 아파트 주차장은 꽉 차 있었다. 모두 외출을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얼마 안 돼 공공도서관 임시휴관이라는 공지를 받았다. 휴관 시작일은 있었지만, 종료일은 '별도 공지시까지', 즉 기한 없는 휴관이었다.
 
 
"마스크를 만들어야 할까 봐요. 원단 파는 곳을 알아봤어요."
 
마스크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여기저기 맘카페나 SNS, 단톡방(메신저 단체대화방)에서 마스크 만드는 방법이 유행처럼 퍼져 공유됐다. 친구는 몇 년 만에 재봉틀을 꺼내 마스크를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1월 중순쯤에 마스크 30개가 들어 있는 제품(1만4490원)을 2박스 주문했다. 개당 483원 정도였다.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사 동료가 황사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놔야 할 것 같다고 해서 덩달아 산 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

'마스크 대란'을 체감한 건 주말에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 갔을 때였다. 마스크 판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1인당 1박스씩만 판매한다는 방송이 연이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무슨 마스크를 사는데 줄까지 서?'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결제를 하려고 나오는데, 앞에 선 부부가 마스크 박스 하나를 들고 즐거워하듯 말했다.
 
"이거 인터넷에서 한 박스에 20만 원인데, 여긴 싸다."
     
응? 한 박스에 20만원? 설마… 호기심에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정말 그랬다. 일주일 만에 개당 2천~3천 원으로 가격이 오른 것이었다. 이것은 2월 초 가격이고, 2월 말인 지금은 같은 제품이 개당 4천~5천 원 정도에 팔리거나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상황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군가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돈을 쓸어 담고 있으리라.

사업의 풍경
     
남편은 건축 관련 제품을 파는 사업을 한다. 직장인과 다르게 사업이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은 감염병 등의 여파를 직격탄으로 맞는다. 이미 지난달 건축박람회에 참가했을 당시 손해를 봤다. 평소 같으면 참가비를 뽑고도 남을 만큼 물건을 판매하고 업체 홍보도 충분히 했을 텐데, 이번엔 그야말로 사람 구경을 별로 못했다고 한다. 전시회 참가는 준비과정에서부터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들인 노력 대비 성과가 없자 남편의 어깨는 축 처졌다.

게다가 방문 설치를 해야 하는 제품 특성상 매출은 떨어졌고, 영업활동도 거의 중단됐다. 업체와 미팅 날짜를 잡았던 것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었다. 다음 전시회도 자동 취소됐다. 손님 없을 땐 그냥 쉬라고, 안될 때는 쉬어가는 것도 정답이라고, 힘내라고 해도 막상 본인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나마 아내인 내가 직장인으로 내가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남편은 말했다.
 
"이런 때는 직장인이 가장 좋아 보여. 어쨌거나 월급은 나오잖아."
 
직장인에게도 또 다른 딜레마가 있다. 코로나19 위기 경보 단계가 '경계'에서 '심각'으로 격상되면서 학교와 유치원의 개학일은 늦춰졌고, 학원도 대부분 임시휴업을 하는 분위기다. 전국의 어린이집 역시 27일부터 3월 8일까지 휴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직장인들은 예외다. 학교 개학은 연기됐지만 학교 선생님들은 출근하고,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문을 닫았으나 직장에 나가야 하는 실정이다.

나 같이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양육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 긴급보육 서비스가 있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맡기는 게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결국 직면한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 언제나 개인의 몫이 된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2주 이내 대구 지역 방문자와 발열하는 직원에 한해서만 재택근무를 권고하다가 최근 맞벌이 가정으로 대상을 확대했지만 단서조항이 많다. 시스템이 24시간 운영되는 업무 특성을 고려해야 하며, 고객의 협의나 리더의 재량에 따라 결정한다고 되어 있다. 강제가 아니니 사기업에서 이 모든 단서조항을 뚫고 쉬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쉬어야 하는 입장에서도 마음 편한 일은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26일을 기준으로 1000명을 넘으며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 속도가 언제 줄어들지 잘 모르겠다. 과연 통제되는 날이 오긴 올까도 싶다. 하지만, 역사가 그랬듯이 큰 범주에서 보면 인류는 바이러스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 인류에 속한 개인으로서 내가 지금 감당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결국 개인은 위생을 철저히 하며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를 원망하고, 누군가를 탓한들 현실은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까. 과도한 걱정과 공포는 오히려 좋지 않다. 힘든 상황에서도 도덕적 가치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오늘을 묵묵히 버티며 살아내는 것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우리는 코로나19 사태가 지난겨울의 일이라며 회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쯤에는 남편의 처진 어깨와 한숨도 과거의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