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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독감백신 접종후 사망한 36명 중 30명은 60대 이상"
한경닷컴 뉴스룸 open@hankyung.com
부산에서 직장을 구한 가장 큰 이유는 외국에 접근하기 쉽다는 점 때문이었다. 부산은 내가 좋아하는 외국 여행지들과 가장 가까웠고, 김해공항은 부산 시내에서 경전철로 몇 정거장이면 닿을 수 있어 편리했다. 나는 언제든지 가볍게 떠나고 돌아올 수 있는 일상 같은 여행을 원했는데, 해외생활과 한국생활을 동시에 누리며 살기에 부산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그런데 부산에서 살면서 오히려 '굳이 멀리 갈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코로나 사태가 찾아오면서 출국하기가 어렵게 되었을 때,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이미 더 이상 해외생활을 동경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부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은 미래도시 같은 야경을 가진 대도시이면서도 구석구석 옛길, 옛 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다. 부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람살이의 부산스러움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래서 부산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공허함이 달아나는 기분이 든다. 한편 내륙에서는 마음먹고 보러 가야 하는 바다를 부산에서는 입맛대로 골라, 마실 가듯 보러 갈 수 있다는 점도 호사스러웠다(부산 사람들은 피서철에 해운대에 가지 않는다! '가진 자'의 위용이 아닐까).

그래서 여행자로서 부산을 찾았을 때 부산은 자극적이고 신기한 곳이었다. 기대도 하지 않은 곳에서 '뭐, 바다라고 질질 끌 필요 있어? 드루와!'라는 듯 쿨하게 펼쳐지는 광안리 해변, 말로만 듣던 해운대의 넓디넓은 모래사장, 사람들의 무뚝뚝하고 열정적인 성미처럼 새빨갛고 굵은 서면 떡볶이, 바다와 벼랑과 집들이 맞물려 꿈길처럼 이어지는 영도의 흰여울마을 길.

하지만 부산 시민이 되어 살아보니, 즐겨 찾게 되는 부산의 매력은 다른 곳에 있었다. 생활에 지칠 때마다 나는 유명 관광지가 아닌 '나만의 명소'를 찾아갔다. 한적한 곳에서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 좋은 데를 왜 안 오지?' 사실 접근성과 규모로 볼 때 관광지로서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내가 체감한 매력도를 따진다면 최상위인 곳들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편애하는 장소들이지만 코로나 19로 인해 붐비는 곳을 피해야 하는 지금은 대중적으로도 적당한 여행지라는 생각이 든다. 해외여행 계획을 포기한 분들이 장기 국내여행을 계획하신다면, 또는 짧은 기간이라도 동네를 둘러보는 듯한 한적함을 느끼고자 하신다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을 소개하겠다.
 
우리 집 마당에 바다를 들인다면
 
 
'일광해수욕장'은 부산의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해수욕장이다. 동해남부선이 생기면서 접근이 쉬워져, 부산 도심에서 1시간 정도 타고 가면 일광역에 닿을 수 있다. 1시간도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에 기차 여행을 하듯 낭만적으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점이 좋다.

도착해서 일광역을 나서면 길을 건너면서부터 벌써 바닷물이 흐르는 하천을 볼 수 있고, 멀리 보이는 바다 풍경을 즐기며 5분 가량만 걸으면 바닷가에 닿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일광해수욕장은 해운대나 다대포, 송정 등 다른 해수욕장에 비하면 매우 소박한 규모다. 해변가의 루프탑 카페 2층에 올라가면 아담한 해변이 더욱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주변에는 높은 건물도 없어서 해변은 가족적이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그렇기에 특별히 무엇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없이 머물 수 있다.

환절기에 일광에 가면 나는 그늘막이 바람에 펄럭이는 카페 옥상에서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담요를 두른다. 코가 시린 느낌을 즐기면서 버틸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아늑한 바다를 감상한다. 여름이라면 피서철 전후로 찾아가, 야트막한 물 깊이를 발로 직접 재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돌아갈 때는 반드시 역 앞의 한 팥집에서 따끈한 수수부꾸미와 단팥죽, 또는 팥빙수를 먹는다. 만 원이 안 되는 돈으로 이 세 가지 별미를 모두 맛보며 옛 다방 분위기를 즐기는 시간도 일광을 찾을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멀리 갈 시간은 없지만 이전과 다른 바다를 감상하고 싶은 분께는 따로 추천할 곳이 있다.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 뒤편에 위치한 '용호부두'이다. 큰 사거리부터 부두에 이르는 길에는 공연석 같은 계단이 많다.

이곳 역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공간이지만, 계단에 올라앉아 바라보는 밤바다는 이제껏 보지 못한 풍경을 보여줄 거라고 확신한다. 오른쪽 가까이에 작은 등대가 보이고, 왼쪽으로 광안대교를, 그 사이 맞은바라기로 마린시티와 누리마루까지 볼 수 있다.
 
 
먼저 도심에서 등대를 만난다는 점이 새롭다. 산책 중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을 때, 갑작스레 나타난 등대 불빛은 신기루 같은 느낌마저 주었다. 또한 광안대교라 하면 보통 광안리에서 보는 각도를 떠올리지만, 다리의 시작 지점에서 비스듬히 감상하는 광안대교는 색다른 느낌이다.

캄캄한 밤에 계단에 맥주 한 캔을 놓고 앉으면 그 이상의 호사는 생각할 수 없다. 시야 한 켠에서 깜빡깜빡 퍼지는 등대의 빛과, 대교를 오가는 차들이 이루는 빛의 행렬, 멀리 있어 은은하게 다가오는 마린시티 고층빌딩 불빛.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이곳에 오면 이런 장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더구나 이곳은 평소 낚시하시는 몇 분 말고 사람이 없어서, 마치 나를 위해 누군가 몰래 마련해 둔 듯한 특별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부터 용호부두까지, 그리고 이어지는 언덕을 걸어올라 이기대까지는 매년 10월에 열리던 '부산불꽃축제'를 감상하기 좋은 장소이다. 광안리에서 직접 축제를 보면 귀가하기가 힘들 정도로 복잡하지만, 이곳에서는 편안하게 보면서도 완전한 모양의 불꽃을 볼 수 있어서 불꽃놀이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폈다. 또한 이 지점은 광안리까지 30분 정도 바다를 옆에 끼고 조깅을 할 수 있는 길(광안해변로 54번길)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일광 해변과 용호부둣가가 나에게 주는 느낌을 한 마디로 한다면 '우리 집 앞마당에 바다를 들인 느낌'이라고 하겠다. 물론 일광은 도심에서 멀고, 이제는 집도 용호부두 근처에서 먼 곳으로 옮겼지만 이 두 장소가 주는 느낌은 언제나 친근하다. 내 마음에 조용히 귀기울여주는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찾는다면 좋을 장소이다.
 
내 귀가 휴식을 요구하는 기분이 들 때
 

햇살 좋은 공원의 잔디밭에 누워서 얼굴에 책을 덮고 여유로움을 즐기는 모습. 이것은 우리가 꿈꾸는 도시 생활의 한 장면이 아닐까. 이렇게나 부산을 좋아하는 나지만, 소음에 취약해서 도시에서 계속 살아야 할지 고민하곤 한다.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리는 정도까지는 못 되더라도, 잠시 도로의 소음에서 벗어나서 자연 속에 사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귀를 디톡스하기 위해 찾는 곳은 '시민공원'이다. 시민공원은 일제강점기에 경마장으로, 그 후로는 2006년까지 주한미군의 캠프에 이용된 부지를 휴식 공간으로 재조성해서 만든 곳이다. 소음이 가장 심한 부산의 대도심, 서면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워낙에 면적이 넓기 때문에 중심으로 들어가면 조용히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은행나무, 느티나무, 왕벚나무, 소나무, 후박나무로 이룬 5개 숲길과 약 300m의 메타세콰이어 길은 공원의 가장 아름다운 볼거리이다. 마음을 정화하는 데에는 '거울연못' 곁을 걷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넓은 타일바닥 위에 얕게 물을 가두고 꽃 화분을 늘어놓은 곳인데, 투명한 물이 바람에 찰랑이며 내는 빛이 아름답다(남1문과 남2문 사이에 있다).

돗자리와 간식거리를 준비해 왔다면 공원 정중앙의 '하야리야 잔디광장'으로 가면 된다. 누워서 보는 하늘은 서거나 앉아서 보는 하늘과 분명히 다르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풀 위에 누워 하늘을 보는 것이 몹시 그리운 시점에서 잔디광장을 찾았었다.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 구름이 바뀌며 흘러가는 모습을 멍 하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닥난 '도시생활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햇볕이 잘 드는 시간에 담요나 겉옷을 챙겨 가시기를 권한다).
 
 
시민공원이 한 번씩 마음의 피로를 풀러 가는 대중탕 같은 곳이라면, '녹음광장'은 매일 샤워를 하는 욕실 같은 곳이다. 부산 시청 청사 바로 뒤에 있는 아주 작은 공원인데, 그 바로 앞에 살고 있는 나와 내 룸메이트는 하루 이틀에 한 번꼴로 이곳에서 산책을 한다.

우리는 이곳을 '개공원'이라고 부른다.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면적이 작은 곳이라 개들도 견주들도 서로 자연스레 마주쳐 무리를 짓는다. 우리처럼 반려견이 없지만 개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들은 먼발치에 어정쩡하게 서서 구경을 한다. 그러다 보면 귀여운 강아지가 다가와 접촉을 허락해 주는 감동적인 순간을 얻을 수 있다. 완벽히 조용하지는 않지만, 도로의 소음을 피하는 데보다 생명체의 소리를 듣는 데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이곳에서는 코로나 시대에도 각자의 즐거움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많이 엿본다. 마스크를 낀 남녀노소가 자기만의 속도로 운동용 트랙을 돈다. 작은 야외공연장에서는 어머님들이 세상 누구보다 진지하게 에어로빅에 임하시고, 등나무 벤치에서는 아버님들이 모여 앉아 세상 누구보다 심각하게 장기를 두신다.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에 따라 일부 장소가 폐쇄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도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는지가 보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내가 느끼는 하루의 피로도 조금 해소되는 기분이다.

정말로 일상이 여행이 될 수 있다면

처음 부산이라는 장소를 알아갈 때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사람들이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곳곳에서 목청 높여 싸우는―실제로는 아주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사람들을 보고 혼자 주눅이 들었는데, 툭툭 던지는 말투와 상반되게 인간미 넘치는 행동에서 또 혼자 뭉클해지곤 했다.

한 아주머니가 "그그는 파이다(그거는 안 좋다), 이기(이게) 좋네" 하고 나에게 공을 패스하듯 물건을 골라주었을 때는 '내가 이분을 만난 적이 있던가' 하고 한순간 진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부산스타일'이라는 것을 알자 그런 분들이 귀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람들의 모습에 익숙해졌지만, 종종 나 자신의 모습에서 재미를 느낀다. 길을 걷다가 내가 먼저 행인에게 "길이 쫌 좁지요?" "으르신, 담배 냄새 때문에 좀 힘드네요~" 하고 이웃처럼 말을 걸며 지나가는 내 모습이 전과 달라 우스운 것이다.

여전히 일상을 여행처럼 살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장소보다는, 장소를 새롭게 보는 눈이 아닐까. 늘 스쳐 지나는 골목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을 때, 낡은 집 대문에 낀 녹과 담벼락이 이루는 색상 배치가 멋스럽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만의 눈으로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무덤덤하던 일상에는 호기심과 자유로움이 생겨난다.

장소뿐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볼 때도 그런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해외에 아쉬움을 갖지 않게 된 것은 내가 있는 곳의 매력을 생활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들여놓을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부터였다. 앞으로도 이 같은 즐거움의 공력을 늘려가고 싶다.

부산에 오신다면 '나만 알고 싶은 장소'였던 추천 여행지에 들러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부산에 오지 않으신다면, 계신 곳에서 더욱 특별한 장소와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란다.
A가 또 이사를 간다고 한다. 오래 살 요량으로 아이 학교 옆으로 이사를 간 게 불과 1년 전이다. 결혼 후 총 8번의 이사를 한 그녀를 우리는 '이사의 달인'이라고 불렀다. 더는 이사를 안 하겠다던 그녀의 인생에 또 한 번의 이사 이력이 추가됐다. 그녀는 낙담했다. 

법도, 경찰도, 주먹도 소용없는 층간소음
 
 
A는 프리랜서다. 회사원 남편과 6학년 딸, 중2 아들이 있다. 지난 번 집에서 층간소음으로 힘들었던 적이 있어 A 부부는 무리를 해서 탑층으로 이사를 갔다. 다른 층보다 1억이 더 비쌌다. 

"이 집은 옥상도 있고, 다락방도 있어. 거기선 눈치 안 보고 놀아도 돼."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주 와서 놀다 가라며 A는 집들이 때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아래층에 인사를 다녀온 뒤 그녀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졌다. 아래층 이웃은 밤톨만 한 아들 셋을 둔 집이라고 했다. '이 집을 선택한 건 정말 잘한 일이야' 그녀는 덩실덩실 춤을 출 기세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집을 싫어하게 됐다. 자꾸만 죄송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호출이 왔다. 죄송하다고 고개를 조아렸다. 또 호출이 왔다. 또 죄송했다. 또또 호출이 왔다. 또또또 죄송했다.  

다 큰 애들이라 뛰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연신 울려대는 벨 소리에 A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아이들을 조심시키려 다락으로 올려 보냈다. 그랬더니 계단 오르내리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호출이 왔다. 

코로나19가 터지자 상황은 더 악화됐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래층 항의는 더욱 집요하고 강도가 세졌다. A는 더 이상 죄송하지 않기로 했다.  

"큰 애들이라 뛰면서 노는 일이 없다. 같은 애 키우는 입장끼리 너무한 거 아니냐. 온 가족이 주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다락에서 노는 것까지 뭐라고 하면 웃돈 주고 이 집에 온 이유가 없지 않냐!"  

감정은 격앙됐고 언성이 높아지며 몸싸움이 오갔다. 급기야 경찰까지 오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경찰은 원만한 합의점을 찾자고 했다. 하지만 끝끝내 원만해지지 못했다.

그녀는 매트를 깔고 슬리퍼를 신고 까치발로 걸었다. 그래도 호출은 계속 이어졌다. 급기야 아래층 남자는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A는 살해 협박으로 아래층 남자를 신고했다. 

그녀는 자주 불안했다.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길에서, 아래층 사람과 마주칠까 봐 자꾸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은 그녀의 집만큼이나 생기를 잃어갔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집이 좋지 않았다. 아니 징글징글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말로만 듣던 층간소음 분쟁이 사람을 이토록 피폐하게 만드는구나. 나는 그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법도, 경찰도, 주먹도 다 소용없었다. 종국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같은 유치하고 악랄한 감정만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괴로워하는 A에게 백 퍼센트 공감의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다. 도를 한참 벗어난 아래층 횡포엔 함께 분노했지만 층간 소음 그 자체에 관해선 다소 냉정했다. A는 맨 위층에 살았지만, 나는 맨 아래층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맨아래층이라 층간소음 걱정 없을 줄 알았더니

우리 집은 필로티다. 아이가 태어나고 필로티만 골라서 이사를 했다. 아래층이 없으니 좀 더 느슨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겠다 싶어서 한 선택이다. 하지만 소리가 윗층으로도 올라갈 수 있다고 해서 눈치껏 조심시켰다.   

우리 집 위층은 올망졸망한 여자애 둘을 키우는 부부가 살았다. 어느 날부턴가가 내 감각의 어느 부분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청각이었다. '후다다다다다다닥', '쿵쿵', '후다다다다닥' 소리라는 것이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자꾸만 그쪽으로 감각이 쏠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종종, 자주, 천장을 올려다봤다. 관자놀이를 사포로 긁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마다 내 몸에 분노 세포가 자라났다. 같은 아이 키우는 처지인데 이해하자는 남편 때문에 분노 세포를 억지로 눌렀다. 다행히 그 분노가 터지기 전에 위층이 이사를 갔다. 그제야 내 감각은 원 상태로 돌아왔다. 

공동주택 생활을 하면 어김없이 따라오는 것이 이 같은 층간소음 문제다. 피하려 한다고 피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A와 나를 보고 알게 됐다. 맨 꼭대기 층으로 이사를 간 A나 맨 아래층을 택한 나나 층간소음에서 벗어나고자 한 선택이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뜻하지 않게 우리 둘 모두 층간소음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고 만 것이다. 

요리조리 피하려고 피했는데도 이 정도라면 다른 집 사정은 더 할 것이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집콕'이 늘면서 층간소음 분쟁이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한국 환경공단의 '최근 5년간 층간소음 접수 건수' 자료에 따르면, 전화상담 건수가 지난해 1만 7114건에 비해 올해 같은 기간 2만 2861건으로 34% 증가했다. 현장진단 접수 건수도 지난해 5075건에서 올해 7431건으로 46% 증가했다.    

이웃 운에 기대 살아야 하는 아파트 살이
 
 
층간소음 문제 건수는 점점 증가하는데 매끄럽게 해결했다는 소식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다양한 법안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있다곤 하지만 피부로 와 닿는 해결책은 없다. 법적대응을 시도한 A도 결국은 떠날 결심을 하고 나서야, 미련하게 참은 나도 떠나보내고 나서야 문제가 해결됐다. 하지만 이것이 해결일지 또 다른 시작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파트에서 사는 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아찔한 기분이 든다. 아래층과 위층에 어떤 이웃이 사느냐, 그 운에 기대야 한다니. 내가 예민한 것인가? 당신이 너무 한 것인가? 이런 생각이 아파트 살이의 당연한 번뇌라니. 

이웃간의 배려와 양보, 예의를 넘어선 손에 잡히는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법은 멀고 이웃은 너무 가깝다. 부디 A가 9번째로 이사 가는 그 집에서는 지금보다 좀 더 편해질 수 있길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저희 많이 시끄럽죠... 아이들 조심시키고는 있는데, 죄송합니다."

아랫집 이웃을 만나면 이렇게 인사하게 되는 우리 집은 아이 셋의 다둥이 가정이다. 사실 아이들이 격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다 보니 걷는 소리나 생활 소음이 아랫집에 많이 전해질 것이다.

공사는 딴 집이 했는데 "시끄럽다"는 민원
 
 
때론 아이들이 무심결에 뛸 때도 있으니 평소에도 층간 소음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거실에는 대형 놀이방 매트 두 장이 오래전부터 붙박이처럼 깔려 있다.

"살살 걸어. 우리 때문에 아랫집이 불편하면 안 되잖아..."

이런 말로 아이들에게 주의를 줄 때면 내가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앉아라. 앉아."

당시 주택 2층에 세 들어 살던 시절, 대여섯 살 정도였던 나에게 뛰지 말라는 것도 아닌, 앉아서 지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주인집 눈치 보느라 답답했던 심정이 얼굴에 묻어난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층간 소음 문제 앞에서 우리 가족은 한없이 작아지기도 한다. 때론 아이가 많은 것이 마치 '원죄'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셋째 막내가 젖먹이 아기였던 시절, 아랫집 아주머니에게서 "뛰지 말아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집에는 아내와 아기만 있었고, 아내는 마침 아기 낮잠을 재우던 참이었다. 알고 보니 다른 층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엔 저녁 시간, 아이들과 둘러앉아 카드 게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랫집에서 올라와서 "시끄럽다"라고 항의를 하는 바람에 집안까지 보여줬다. 알고보니, 우리 집 대각선 윗집 아이들이 뛰는 소리였다. 상황을 확인하고 돌아가면서도 아랫집 아주머니는 여전히 우리에게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미안할 때도 많지만, 이렇게 억울한 적도 많다.

층간 소음을 문제삼은 적 없는 우리집

이런 경험 때문인지 아이가 많은 우리는 이웃에게 가능한 너그러우려고 노력한다. 지금까지 윗집 이웃의 대부분은 아이가 있는 가정이었다. 자주 뛰는 아이도 있었지만, '우리도 그럴 텐데...'라는 생각 때문에 한 번도 층간 소음을 문제 삼은 적이 없다. 다행히 식구들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잘 이해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 소리가 아랫집에 어떻게 들리는지 알겠지?"라며 더 조심하게 된다. 

지인들 중에는 층간 소음을 피해 이사할 집을 고르는 가정도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있는 집들은 맘껏 뛰어놀라고 1층이나, 1층이 필로티인 2층으로 이사하곤 했다. 또 위층의 소음이 거슬렸던 사람들은 꼭대기 층을 택했다. 낮은 층은 벌레와 방범에 신경이 쓰이고, 꼭대기 층은 결로와 곰팡이의 걱정이 있지만 층간 소음의 스트레스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말했다. 

필요에 따라 주거 환경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거다. 결국은 서로 더 배려하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24.10.2020 팬티 딜레마
살이 7kg 정도 쪘다. 성년이 된 이후 최저 몸무게를 아이 낳고 경신했다. 그러다 이제야 적당히 살이 붙은 것이다. 마흔에 첫 출산을 한, 호기심 넘치는 세 살 남아를 키우고 있는 엄마의 육아는 체력과 기운이 8할이므로 이 정도 몸무게를 유지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팬티가 꽉 낀다는 것이다. 이참에 사각팬티로 갈아 타보자 싶어 며칠 생각날 때마다 검색을 했다. 원래부터도 속옷은 면 100%만 입는데 삼각팬티는 쉽게 구해지지만 사각팬티는 순면으로 된 것이 드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각팬티의 관건은 허벅지 부분이 밀려 올라가지 않도록 딱 고정되게 잡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면으로는 부족하다.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 기능을 더한 섬유가 들어가 줘야 한다.

"점점 더 많은 의류가 면이나 모직 대신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으로 제조되는데, 둘 다 플라스틱이다."
- <지구에 대한 의무> 스티븐 부라니 외

"전 세계 바다로 유입되는 플라스틱 가운데 3분의 1 이상은 옷을 세탁하면서 나온 것이다."
- <플라스틱 없는 삶> 윌 맥컬럼

"물질의 위계 질서는 폐기되었다. 단 하나의 물질(플라스틱)이 모든 물질을 대체한다.(중략) 훨씬 유연한 동시에 다루기 쉽고 대체된 물질보다 엄청나게 저렴하고 가볍다는 플라스틱만의 독특한 특성은 세계 경제가 폐기 중심의 소비문화로 이동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 <지구에 대한 의무> 스티븐 부라니 외


얼마 전 읽은 환경 책에서 봤다.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는 플라스틱이라는 것, 바닷속 미세 플라스틱의 3분의1은 우리가 세탁할 때 나오는 섬유에서 기인한다는 것. 플라스틱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섬유가 플라스틱이라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하여, 나는 순면 사각팬티를 시험 삼아 딱 한 장 샀다. 역시나 밀려 올라가는 게 문제다. 종일 신경 쓰며 잡고 끌어내린다. 이건 안 되겠다. 다시 검색한다. 길이를 5부 정도로 좀 더 길게 만들어 밀려 올라가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홍보 문구를 보고 순면 사각팬티를 다시 주문한다. 이번에도 실패다. 면 특성상 잠깐만 입어도 쭉쭉 늘어나 몸에 고정되지 않고 여전히 올라간다. 이건 집에서 반바지처럼 입고 지낸다.

 
  
고민이 된다. 타협하고 나일론으로 만든 기능성 사각팬티를 살 것인가? 타협하지 않고 순면 사각팬티를 입고 연신 잡고 끌어 내릴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꽉 끼는 삼각팬티를 계속 입을 것인가?

결론은 이렇게 났다.

"이래도 될까" 싶게 큰 사이즈의 순면 삼각팬티를 사보자!

"나랑 같은 사이즈 입는데?"라고 놀리는 남편의 말을 가볍게 넘긴 채 두 사이즈 큰 팬티를 샀다. 결과는 놀랍게도 나한테 딱 맞았다는 것(이제는 팬티 사이즈에 대한 딜레마를 시작할 때인가).

팬티 문제는 일단락이 났다. 섬유의 조성이 눈에 밟히기 시작하자 내 옷장에 걸린 옷들이 못마땅해진다. 옷뿐이랴. 폴리에스테르 100%짜리 기능성 이불도 있다. 심지어 큰맘 먹고 비싸게 주고 산 것이다. 당장 내다 버리진 않으련다. 오래 입고 쓰되 세탁 횟수를 줄이는 것으로 일말의 죄책감과 미약한 뿌듯함을 공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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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는 니들이 갔다 와라."
"그게 무슨 말씀이여. 당사자인 아빠가 가야지."
"수술하지 않을 건데 가면 뭐 하냐. 공연히 열만 받다가 오겠지."


서울 큰 병원에서 받은 종합검진, 정밀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 송강호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아이 씨X! 뭐 이래! 뭘 조심하라든지 뭐 어떻게 하라 이런 것도 없이 당뇨라고 하면 끝이여..."

정밀검사 결과를 놓고 서울 큰 병원의 암 전문의는 분명 '수술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라고 할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3분 진료로 수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운명을 결정짓는 문제 앞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영화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처럼 이렇게 말할 것이었습니다.

"아니 위를 통째로 잘라내야 한다. 그걸로 끝입니까? 다른 방법이 없다.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 내겐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 있는디. 그 어떤 선택의 여지없이 그런 말 밖에 못하는 겁니까? 뭐 이런 X같은 경우가 다 있어!"

화를 내는 것은 암환자에게 독입니다. 어차피 수술을 거부한 나는 그 분노의 독배를 마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사에게 물어볼 몇 가지 질문 요지를 챙겨 두 아들만 보냈습니다.

크기 3센티, 진행성 중기위암 최종 판정

서울 큰 병원에 갔던 두 아들이 영어로 된 종합검진 결과서를 내밀며 의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역시 의사가 사무적인 어투로 '다른 방법이 없다. 수술이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빤한 대답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수술을 위한 뭔 검사를 또 해야 하고 20여 년 전, 축농증 수술을 위해 엑스레이를 찍다가 발견돼 그대로 멈춰 있는 폐의 작은 혹(용종?) 같은 것을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0년 전 축농증 수술을 했던 대학병원에서는 폐에서 발견된 혹이 암 덩어리일 가능성이 있다며 조직 검사를 권했고, 조직검사 도중에 문제가 생겨도 병원 책임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직검사를 하다가 자칫 폐에 출혈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확실한 암 덩어리도 아닌데 폐출혈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 조직 검사를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매일 같이 산에 올라 단전호흡과 더불어 명상과 기혈운동을 했습니다. 수술을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보다 사망할 가능성이 더 많은 폐암일지도 모르는데 팔자 늘어지게 산에 올라가 명상이나 하고 있으니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나를 각별히 챙겼던 작은 형님이 호흡기 전문의 권위자를 찾아내 진료 예약까지 해놓았습니다. 그 전문의는 조직검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며 한 달에 한 번, 세 달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씩, 검진 날짜를 늘여나가며 폐에 생긴 혹의 진행 상태를 검사했고 1년 후에도 그대로 멈춰 있어 건강에 아무런 지장이 없음을 밝혀냈습니다. 그때 만약 조직검사를 하다가 폐에 손상을 입었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사인한 각서 때문에 아무런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고생깨나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종합검진 결과 20년 전 그대로인 폐의 혹을 수술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번째 정밀검사를 통해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영어를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영문으로 된 기록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행 암이며 그 암 세포 덩어리의 크기가 3센티 정도 된다는 것과 2기인지 3기인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배를 갈라 봐야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연요법을 선택한 내가 가장 우려했던, 식도로 전이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 만약 식도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다면 수술을 고려해야 했는데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나머지 검사 결과는 신장 결석을 제외하고 건강한 사람들과 다름없이 대체로 양호했습니다. 병원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죽음을 또 다른 일상으로 받아들이다

수술 거부와 동시에 죽음을 또 다른 일상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자 온몸을 짓누르던 무거운 바윗돌 하나를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상하리만큼 몸이 그 어느 때보다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가벼운 숲 속 산책에서 만나는 온갖 생명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말을 걸고 싶을 정도로 모든 생명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 경이로움에 기분 좋은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누군가 보면 미친 사람이라 할 정도로 숲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웃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온 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생기가 솟아났습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어느 순간 난데없이 이순신 장군의 말이 떠올라 또 한바탕 와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짐짓 면역세포에게 명을 내렸습니다. 천길 벼랑 끝에서 죽을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더 이상 암세포에 밀리지 말 것을.
 
 
죽음의 사신처럼 다가온 암세포에 맞선 나의 배수진은 수행자들의 계율과 다름없습니다. 옛 선사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행자가 목숨을 걸고 자비행을 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계율을 지켜나가듯 나 또한 목숨을 걸고 암세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율이 필요 했습니다.

그 계율은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온몸의 기혈을 풀어주는 기혈운동. 그리고 술 담배를 끊고 탄수화물이 많은 음식, 맵고 짜고 탄 음식과 발암물질, 육식을 멀리하고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꿔나가는 것입니다(명상, 기혈운동, 식이요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차후에 언급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나는 죽음의 사신 앞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끌어안고 숲속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누구는 죽을병에 걸린 자의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나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바꿔 놓고 있는 암 덩어리야 말로 가혹한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탐진치(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냉철하게 마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스승. 극과 극은 통하듯이 내 안의 무자비한 암세포는 인정사정없이 수행자를 탐진치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는 혹독하고 가혹한 스승이나 다름없습니다.
결혼 전, 사랑과 자비심을 품고 평생을 살아가겠노라 다짐해가며 한때 수행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파계승처럼 한 여자를 만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내가 품은 마음이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현실 앞에서 무참히 무너져 내렸던 사랑과 자비가 죽음을 앞두게 되자 비로소 몸과 마음으로 절실하고 간절하게 안겨왔던 것입니다.

누구는 죽을병에 걸린 자의 정신 나간 소리라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암세포가 그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을 혹독하게 직시해가며 진정한 사랑과 자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마지막 기회를 준 것입니다. 혈기왕성, 한창 젊었을 때조차 목숨 걸지 못한 수행자의 길을 암 세포가 주었던 것입니다. 이만한 스승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화입마

솔숲에서 기혈운동과 명상을 하고 기분 좋게 산막에 돌아왔는데 큰 아들 인효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빠,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어?"
"뭘?"
"수술 받는 거."
"그 얘길 또 왜 꺼내. 너희들도 아빠 생각에 공감한다고 했잖아."
"수술 안 하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대. 수술 거부한 암환자 만 명 중에 한 명이 살아남을까 말까 하대. 그리고 수술 안 하면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 뇌까지..."
"누가 그래?"


평소 알고 지내던 의사 분이었습니다. 그는 수술을 거부한다는 나의 SNS 글을 접하고 그 결정이 걱정되어 큰 아들 인효에게 넌지시 전화를 걸어 수술하지 않으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의사로서의 소견을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의 의도와 다르게 겨우 아버지의 선택에 마음을 다잡아가고 있는 녀석들에게 두려움과 갈등을 심어주었고 부질없는 희망까지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그 아저씨는 아빠가 걱정되니까..."
"나도 그 아저씨 맘 모르는 게 아닌데, 이제 그 얘기 그만하자."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되겠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 눔 자식이! 맘 심란하게 그만해! 앞으로 그런 전화는 받지도 말고 받았어도 아빠한테는 얘기 하지 마! 니들이 그런 마음 내려놓지 못하면 아빠는 더 힘들어. 아빠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당장 산막에서 나가! 주화입마라고 어떤 것에 집중할 때 옆에서 자꾸만 딴 소리하면 오히려 독이 되니까."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주화입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상이나 온 마음을 집중하고 있을 때 어떤 외부작용으로 인해 몸속의 기가 뒤틀려 호흡 곤란 등 몸과 마음이 큰 혼란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

큰 아들에게 버럭 화 낸 마음을 다잡아 나가기 위해 다시 솔숲 길을 걸었습니다. 불과 한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만물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가득했는데 그 마음자리가 한 순간 이슬방울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숨고르기로 겨우 화를 가라앉히고 나자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겠노라는 아비에 대한 두 아들의 태산 같은 걱정과 슬픔과 고통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습니다.

가혹한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녀석들이 불쌍하고 내 자신이 불쌍했습니다. 태어나면 죽어야만 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가련하고 불쌍하게 다가왔습니다. 조금 전까지의 죽음에 대한 그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비로소 내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암환자, 나약한 생명이라는 사실이 현실로 바싹 다가왔습니다.
 
 
빛을 삼킨
영롱한 이슬방울로 왔다가
한 순간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너와 나
본래 하나이거나 없음을

2018.겨울 생명을 떠올리며
지난 몇 달간 진행한 나의 첫 고향 수유리 답사는 사라진 옛 흔적들을 찾는 과정이었다. 다가구 주택이 된 나의 옛집과 오래전에 없어진 유치원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간 초등학교의 옛터를 찾는 과정부터 그랬다. 그 과정에서 사라진 흔적들을 복구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많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지난 여러 번의 수유리 답사에서 나의 옛집과 유치원과 학교 외에도 찾고 싶은 곳들이 또 있었다. 장미원과 그린파크다. 아마 나와 같은 시대인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 수유리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기억하고 있을 추억의 장소일 것이다.

장미원이 사라지고 남은 흔적
  
   
 
장미원은 현재 우이신설 경전철 가오리역과 419민주묘지역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장미 농원이다. 한신초등학교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갈 때와 집으로 돌아올 때 차창을 스치듯 가까이서 만발했던 장미들이 기억난다.

장미원은 어떤 곳이었을까. <조선일보> 1962년 2월 2일자 '꽃 중에서도 여왕(女王)' 기사는 장미원을 "우리나라에서 장미를 제일 많이 기르는" 곳으로 소개한다. 또한 <조선일보> 1964년 3월 2일자 '장미 가꾸기 강습' 기사는 장미원이 일반인들에게 장미 키우기를 가르치고 보급하는 농장으로도 소개한다.
 
그리고 장미원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람들이 즐겨 찾는 나들이 장소 중 하나였다. 소설가 송기원은 1993년 10월 22일 <조선일보>에 게재한 수필 '따뜻한 추억'에서 장미원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60년대 후반 무렵) 수유리에는 4·19탑뿐만이 아니라 장미원도 있어서 대부분이 나처럼 지방에서 유학 온 가난한 시골 출신들에게는 값싼 데이트 장소로 애용되었다.
 
소설가의 술회처럼 장미원은 나도 내 친구들도 가족들과 나들이 가던 곳이었다. 그만큼 나와 내 친구들 어릴 적 사진에는 장미원에서 찍은 것들이 많았다. 그런 장미원이 1970년대 말에 문을 닫고 그 자리는 주택가로 변했다. 신문 기사를 검색하면 1980년대부터는 개발 광고와 분양 광고만 검색된다.
 
그렇게 장미원은 사라지고 '장미원' 버스 정류장과 '장미원 골목 시장'이라는 지명으로, 길가 화단에서 장미를 가꾸는 것으로 그곳에 장미원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철물점, 부동산, 기원 등 몇몇 가게에 붙은 간판에 장미원은 흔적으로 남았다.
  
   
난 장미원을 기록한 자료와 장미원을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을 찾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했다. 내 취재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혼자 장미원을 그리워하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가 최승린의 '수유리, 장미원'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오래전에 없어진 장미원을 찾아 헤매는 어떤 노인처럼.
 
나도 소설 속 노인처럼 동네 사람들에게 "여기에 장미원이 있었지요?"라고 물어보고 다녔다. 하지만 명쾌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길에서 물어본 학생 중 장미원이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없었고 장미원이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들도 그곳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의 나들이 명소였던 장미원은 우리 세대 일부의 기억에만 남는 곳이 됐다.

그 시절의 워터파크
     
   
 
장미원 못지않게 그린파크도 명소였다. 2020년에 대형 워터파크가 있다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그린파크가 그 역할을 했다. 그린파크는 원래 1968년 우이동에 문을 연 호텔인데 부속시설인 야외수영장이 더 유명했다.

그린파크는 2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수영장이었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슬라이더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인기였다. 1972년 7월 22일자 <경향신문> '자녀 손 이끌고 가까운 물 쉴 곳을 찾는다' 기사에는 그린파크 이용 안내가 담겼다. 대인 400원과 소인 300원의 입장료로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지만 하이슬라이더는 1회에 20원을 추가로 내야 한다고.
 
난 유치원 시절 그린파크에 단체로 갔던 추억이 지금도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다른 놀이나 오락거리가 많이 없었던 1970년대 초반에 대형 수영장과 다양한 놀이 시설을 가진 그린파크는 내게 다른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린파크도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
 
그린파크가 있던 곳과 가까운 우이신설 경전철 북한산우이역 입구에서 등산객들에게 그린파크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젊은 등산객들은 거의 모른다고 했고 나이 지긋한 등산객 중에는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지목하는 위치도 대략 비슷했다. 북한산 계곡을 끼고 도선사 방향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오른쪽에 자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지금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이동 유원지나 그린파크 수영장으로 유명했던 그곳은 2000년대 이전에 운영을 중단했고 지금은 콘도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국립공원 근처인 이곳이 어떻게 개발이 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논란이 많았던 모양이다.
 
개발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개발제한구역이니까 콘도를 못 짓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찬성 측에서는 개발제한구역과 국립공원 경계 밖의 토지라고 맞섰다고 한다. 논란 끝에 공사가 시작됐지만 사업자의 부도로 한동안 방치됐다가 2019년 공사가 재개됐다. 현장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2021년 준공을 계획으로 공사한다고 했다.
 
공사장은 등산로 입구 가까운 곳에 있다. 예전에 이 코스로 북한산을 오르면 계곡 소리를 들으며 산행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공사장 소음을 들으며 산행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공사는 언젠간 끝나겠지만.
 
      
나의 유적

이번 연재를 위해 나와 같은 동네에 살았거나 같은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을 취재했는데 그들도 나와 공유하는 추억이 많았다. 집과 동네를 제외하고 수유리를 생각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게 4·19 묘지이고 그다음으로 장미원과 그린파크였다고.
 
많은 이의 추억 속에 남은 장미원과 그린파크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름만 흔적으로 남고 그냥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없어진 자리는 개발됐다. 택지 개발이든 휴양시설 개발이든.
 
만약 개발 과정에서 과거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다면 공사를 중단하고 조사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유물이나 유적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지 아니면 그대로 보존할지를 신중하게 논의한다. 여기서 유물 혹은 유적이란 최소한 근대 조선 시대까지의 것들을 의미한다. 근대 이후 일제 압제 시절이나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것들은 그냥 부숴버리거나 묻어버린다.
 
그런 과정에서 개발의 구호 아래 장미원과 그린파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울선언>과 <갈등도시>를 쓴 도시 문헌학자 '김시덕'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누추해 보이고 비참해 보이고 부끄럽게 느껴져서 부정하고 싶어지는 20세기의 유물 유적까지도, 현대 한국을 구성하는 귀중한 전통의 일부라고 말입니다. - 김시덕 <서울선언'>중
 
내게는 어쩌면 장미원과 그린파크가 유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찾아야 할 유적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나마 남은 흔적이 없어지기 전에 어서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출산 때 이후로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지낸 적이 또 있던가 싶다. 아침에 눈만 뜨면 동네일로, 아이들 학교일로, 각종 모임으로 사방팔방 헤집고 다니며 오지랖 떨던 사람이 오늘도 집, 어제도 집, 내일도 집뿐인 생활에 적응한다는 게 당연히 쉬울 리가 없다.

하필 갱년기까지 겹치는 바람에 심리적, 신체적으로 더 심난한 나날이다. 어떻게든 기분을 추스려 보려고 마음에 관한 이 책, 저 책을 들춰보지만 효과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온라인 수업하는 아이들이 늘 집에 번갈아 있지만 다 큰 아이들이 나와 놀아줄 리 만무하고 아무래도 마음 붙이고 혼자 즐길 거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곤 했다. 

나만 이렇게 답답하게 지내고 있을까
 
 
그러던 중 사회적 거리두기가 드디어 1단계로 완화되며 실로 오랜만에 지인들과 동네 카페에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서로의 근황들은 간간이 카톡으로 공유하고 있었지만 이 힘겨운 시기를 다들 어떻게들 넘기고 있는지 많이 궁금했다. 오가는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 들어보니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지혜롭게 코로나 시기를 잘 보내고 있었고 내 생활에 참고할 것도 많았다.

코로나 전에도 혼자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떠나는 등 뭔가를 홀로 즐기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던 지인은 역시나 오랜 집콕 생활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뜨개질로 크로스 백을 색깔별로 뜨다 보면, 애완견의 후드 스웨터까지 뚝딱뚝딱 만들어 주변에 선물로 주다 보면 하루가 짧았단다.

마침 추워지는 날씨에 시가에서 키우는 애완견의 옷을 떠 선물로 드렸는데 시어머니께서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진심으로 고맙단 말씀을 자꾸 하셔서 자신도 참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듣는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주변에 도움도 드리고 인정도 받으며 나름 보람찬 일상을 보내고 계셨다니 정말로 놀라웠다. 
 
 
또 한 지인은 지난 여름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본인도 집안 정리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셨단다. 직장인이신 이 분은 매우 활동적이고 운동을 좋아해서 쉬는 날에도 웬만하면 집에 머무는 분이 아니다.

하지만 집안 정리를 시작한 이후로는 몇 달째 틈 날 때마다 거실, 베란다, 작은 방에 있는 눈에 거슬리는 서랍장들과 이것저것 넣어 둔 큰 가방들을 하나하나 처분하고 정리 중이란다. 그러다 보니 집이 조금씩 조금씩 넓어져가는 마술을 경험하고 있다며 뿌듯해한다. 어쩌면 이렇게 코로나 집콕을 알차게 보낼 수가 있는지 감탄스러웠다.

처지는 기분 탓만 하고 진작에 다른 즐거운 일들을 더 찾지 못하고 있던 내 모습이 저절로 반성이 되었다. 음료를 마실 때만 살짝 마스크를 들출 뿐 대화 내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느라 분명 답답할 법도 한데, 눈 마주치며 서로에게 귀 기울여 듣는 이 시간을 다들 얼마나 고대했던지 오후 1시에 모여 6시에 파하는데도 자리를 뜨기가 아쉽기만 했다. 

뜻밖의 인정과 성취감

지인들처럼 나도 내가 좋아하는 걸 더 찾아보려 골몰하는 중에 같이 동네일을 하는 아는 분께 연락이 왔다. 동네에서 <가죽 카드지갑 만들기> 강연을 준비하니 온라인 방송날 방송 모니터 좀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는 주민자치회 활동이 활발해서 주민들을 위한 각종 강연이 자주 운영되고 있다. 

<명화 인문학>이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재테크> 강연처럼 듣기만 하는 강연도 있고, 직접 손으로 만들어 보는 양말목 공예, 꽃 코디얼, 마크라메 강연 등도 주민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모두 온라인 강연으로 진행되고, 무엇보다 무료이거나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손쉽게 참여할 수 있으니 혼자도 좋고, 아이들과도 함께 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 보장된다. 

온라인 방송날 방송 모니터를 하고, 밴드에 업로드해주신 주민들의 완성품 사진에 좋아요, 멋져요 댓글을 달며 즐거웠다는, 감사하다는 그분들의 말씀을 읽다 보니 내가 언제 우울감 때문에 고민했었나 싶을 정도로 오랜만에 기분이 맑게 개어짐을 느꼈다.

프로그램에 참여만 해도 즐겁지만,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누군가를 위해 소소하지만 행사를 지원하는 일을 직접 할 때 또 다른 보람과 기쁨이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코로나 때문에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에 대한 해결책은 생각보다 가까운 데 있고, 방법도 의외로 매우 쉬운지도 모른다. 내가 보람을 느끼는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찾아보고 더 많이 하는 것 말이다.  

참고로 요즘엔 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주제의 강연들과 프로그램들을 준비하는 지자체가 많은 것 같으니 필요하다면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지자체의 관련 정보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많이 찾기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지난봄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포스트 코리아, 행복의 척도가 달라진다>는 주제로 대담을 진행한 적이 있다.

당시에 그분이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행복에 관한 말씀만을 정리하자면, 코로나를 겪으며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주입되어 뭔가를 자꾸 원하게 되는 'want'에 주목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찾아내고 즐기며 거기서 전문성을 습득해 나가는 'like'의 세상을 살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우리들이 'want'의 삶에서 'like'의 삶으로 옮겨간다고 알아챈 그분의 통찰이 놀랍다. 그러고 보면, 좋아하는 손뜨개 취미를 살려 즐겁게 보내는 지인의 모습도 여기에 해당되고, 대대적인 집안 정리를 하며 새로운 기쁨을 알아가는 지인의 모습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오랜 우울감 끝에 좀 더 많은 즐길 거리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던 나의 행태도 그렇고 말이다. 

사회적으로도 코로나 초반에 달고나 커피 만들기 열풍 이후로 슬기로운 집콕 생활이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콘텐츠들을 다루는 영상과 기사들이 지속적으로 자주 눈에 들어오는 것도 분명 그런 예들이다. 홈트레이닝과 홈카페, 홈베이킹, 랜선 여행법 등등 말이다. 꾸준히 자주 이런 정보들이 눈에 띄는 걸 보면, 코로나 이후로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아 열중하며 즐기는 사람들이 코로나 이전에 비해 확실히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김경일 교수는 또한 행복하려면 조금씩 자주 기쁨을 느끼는 일을 찾고 만들 것을 권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자주 할 때, 그러니까 조금씩 자주 행복할 수 있을 때 아무리 코로나로 집콕 생활이 길어져도 우울감에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렸다. 댓글을 달며 연결된 다른 주민들과의 소통이 결국 나를 힘나게 했다는 점을 기억하며 내가 좋아서 즐겨하는 일이 또 뭐가 있으려나 설레며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기분 좋은 날이다. 

힘들었지만 오랜 우울감을 겪어낸 것이 아주 무용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탐색하고 찾게 하는 새로운 삶의 단계로 나를 옮겨놓은 귀한 시간으로 의미 지워지는 걸 보면 말이다. 저처럼 코로나 우울을 힘겹게 통과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 즐겁고 좋아하는 일 많이 많이 찾아보세요. 힘이 납니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