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다. 여기저기 동네방네 모두 꽃 동네 꽃 잔치에 새 노래는 덤으로 즐기란다. 세상사 시끄럽고 황사랑 미세먼지의 심술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봄 한 철만큼 예쁠 때가 없을 듯하다. 가만히 내가 볼 수 있던 때를 되돌아봐도 알록달록 화려한 가을이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냈다면, 울긋불긋 따사로운 봄은 갓 피어난 생명답게 귀엽고 깜찍하니 예쁘단 말이 제격이었다.
 
이런 봄날, 흰 지팡이 하나 들고 나서기만 해도 마음은 설레고 흥에 겨울 텐데, 어찌 집에만 머물 수 있을까. 아내와 나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시각을 대신하는 손끝
 

분당 시내를 흐르는 탄천은 이미 북적였다. 삼삼오오 사람들의 웅성거림, 풀밭 위를 뛰노는 아이들의 깔깔거림, 여기저기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새들의 지저귐과 견공들의 기운찬 울부짖음까지. 내 팔을 잡은 아내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내 감각 기관들이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야멸치게 떠나버린 내 시각을 대신해 청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 기관들이 그동안 해오던 역할의 몇 배나 되는 부담을 지게 된 까닭이다. 아내가 눈치챘는지 내 팔을 당겨 안았다.

"와, 너무 많네. 저쪽으로 가면 조금 한가할 거예요."
 
얼마쯤 걸었을까. 불현듯 따사로운 햇볕 사이로 파고드는 은은한 바람이 느껴졌다. 내 귀를 통해 본 주변도 한가해졌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 바람이 가져온 봄소식을 한껏 들이마셨다.

한참 제 자랑에 여념 없는 꽃향기도 들어 있고, 더욱 세진 햇살도, 되살아난 물소리도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아옹다옹까지 모든 게 바람 속에 들어 있었다. 좋았다. 그래서 나는 바람과 만날 수 있는 바깥이 좋다. 아무리 요란스럽고 위험하다 해도 바로 이 맛에 굳이 아늑하고 안전한 실내를 떠나 바깥으로 나오는 거다. 
 
나만 좋은 게 아니었다. 아내도 좀처럼 나아가질 못했다. 빛을 품은 연분홍 벚꽃 그늘에 발을 붙잡히고, 샛노랑 거대한 울타리로 버티고 선 개나리에 눈길을 빼앗기고, 그들 사이 곳곳에서 수줍게 피어나는 여러 꽃들에 마음까지 빼앗겨서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단다.

"와, 예쁘다, 정말 예뻐. 저게, 저게 뭐더라? 밥풀꽃이었던가?"
"밥풀꽃?"

내 머릿속에도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갓 지은 밥알이 긴 가지에 잔뜩 묻어 있는 것 같기도, 막 튀겨진 팝콘이 수북이 매달려 있는 것 같기도 했던 꽃, 꽃 박사 친구와 긴급 통화를 마친 아내가 외쳤다.

"조팝나무래. 이리 와 봐요. 자, 조심조심 만져봐. 이 꽃 기억나죠?"

복슬복슬, 아직은 덜 자랐는지 별사탕만 한 탐스러운 꽃 무리가 마치 곱고 부드러운 털장갑 낀 손 같았다. 꽃은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이젠 내 손도 제대로 꽃을 보는구나. 근데, 그땐 왜 그랬을까?"
"응? 그게 뭔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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