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달라졌다. 노랑을 닮은 연두와 초록 물이 살짝 들다 만 것 같은 연두, 연두의 누이 같은 초록과 만지면 푸르름이 묻어날 것 진초록, 은근하고 끈기 있게 자리를 지키는 녹색이 한데 어우러져 사방이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4월부터 5월 초까지만 볼 수 있는 봄의 향연이다. 5월 중순이 되면 제각기 몸빛을 자랑하던 나무들은 같은 색으로 닮아가며 초록 숨을 내쉴 것이다.
  
며칠 동안 집을 비웠다 돌아온 다음 날, 올봄 마지막 쑥국이나 끓일까 하고 바구니와 가위를 찾아들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뒷마당에서 한 길 높이만 올라가도 쑥을 캘 수 있다. 봄만 되면 욕심내지 않고 (사실은 캐기 힘들다)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뜯어 봄맛을 느꼈다. 잎이 억세지기 전에 한 번 더 캘 요량이었는데 아뿔싸, 빈터에 풀이 수북하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어린 쑥은 없다. 토끼풀과 잡풀들 사이에 섞여 캐기가 어렵거나 쑥쑥 자라 이미 무릎까지 자란 쑥만 지천이다.
 
전원주택으로 이사 온 후 세 번째 맞는 봄이지만 산나물은커녕 아직 지칭개와 냉이도 구분하지 못한다. 그나마 자신 있게 아는 것이 쑥인 데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로 캘 수 있으니 봄이 되면 밥상에 자주 올리는 것이 쑥국과 쑥전이다. 시내 살 때는 그냥 넘기긴 아쉬워 마트에서 파는 쑥을 두어 번 사다 국을 끓여 먹는 게 다였다.

쑥국을 자주 끓이다 보니 요령도 늘었다. 깨끗이 씻은 쑥을 칼등이나 손으로 문질러 쑥향을 진하게 내는 법을 알았고 멸치 육수에 된장을 조금만 풀어 쑥맛을 최대한 살리면서 시원하게 끓이거나 때로는 쌀뜨물이나 콩가루, 들깨가루를 풀어 구수하게,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두부를 얇게 썰어 넣어 끓이기도 한다. 올봄에는 바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심란하여 쑥을 몇 번 캐보지도 못하고 시기가 지났다. 아쉽지만 떠나는 봄과 함께 내년을 기약하며 올해의 쑥과 이별한다.
   
마당 옆으로 우리 집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이웃집 비닐하우스 두 채가 있다. 올해는 열무를 심었다고 했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하우스 문을 열어 두니 고개만 들면 싱그런 열무잎들이 보였다. 올해는 여리여리하고 싱싱한 열무를 사서 김치를 담가 여름까지 먹을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가격이 싸면 넉넉히 사서 지인들에게 나눔도 해야겠다고 수확할 때만 기다렸다.

하지만 하우스 주인이 바빠 수확시기를 놓쳐 웃자란 열무는 벌써 줄기가 뻣뻣해져서 판매 시기를 놓쳤다. 얼마든지 뽑아 가라고 했지만 엄청나게 많은 양이 밭에 있으니 또 담글 생각으로 옆지기에게 김치통 하나 채울 양만큼만 뽑아 달라고 했다. 그는 열무를 뽑아 오며 밭 가운데 열무는 아직 어리니 천천히 뽑아도 될 것 같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서둘러 열무김치부터 담글 생각으로 열무를 뽑아 오라 했더니 옆지기가 빈손으로 왔다. 대부분 키가 1m 남짓 자랐고 꽃대가 올라와서 늦었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마당에서 보니 하우스 안에 흰 꽃이 수북하다 못해 화원이 되어 있었다.

열무꽃을 본 적이 없어 가까이서 보고 싶어 비가 오는 데도 장화를 신고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마트에서 단으로 묶어 파는 어리고 야들야들한 열무만 보았지 꽃핀 열무는 처음이다. 키가 한길이나 자라 무리 지어 흰 꽃으로 수놓은 열무밭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란 유채꽃밭은 관상용으로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하얀 열무꽃밭이라니. 아름답고 신기한데 안타깝고 속상하다. 애가 쓰이다 못해 슬프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어린 쑥은 짙은 향기만 남기고 그새 줄기와 잎이 억세졌고 어린 열무들은 눈만 호강하는 꽃밭이 돼 버렸다. 무엇이든 때가 있음을 깨닫는다. 제철 먹거리를 거두고 농작물을 수확하는 일은 너무 서두르면 덜 여물고, 오늘내일하고 미루다 보면 시기를 놓치게 된다.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도 한 가지다. 혼자 앞서가면 그 맘이 온전히 가 닿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새삼스러워 머쓱하고 어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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