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강원도 강릉 오죽헌과 허난설헌 생가를 찾았다. 청명한 푸른 하늘, 봄바람에 한들거리는 초록 잎사귀들, 진한 향기를 내는 붉은 목단향이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양문인협회에서 강릉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신사임당과 이이의 생가 오죽헌
 
첫 방문지는 오죽헌(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이었다. 이곳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로 신사임당이 아이를 출산한 몽룡실도 있다. 오죽헌은 그리 빼어난 경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정했고 시야가 탁 트여 시원했다.
 
신사임당(1504~1551)은 조선 중기의 여성 예술가이다. 4남 3녀 중 3남인 율곡 이이는 6세까지 이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 화폐에 새겨져 있고 교육열이 뜨거운 우리나라에서 신사임당은 자식을 성공시키고 자신도 명예를 얻은 선망의 대상이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아서 더욱더 이들 모자를 부러워하는 것 같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에도 20년이 다 되도록 친정에서 지냈다. 신사임당에게는 아들 형제가 없어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된 어머니를 돌보며 아들 노릇을 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 신사임당이 살던 시절에는 여성이 결혼 후에도 친정에 머물며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요즘이야 그런 경우가 많지만 유교 사상이 팽배한 조선시대에 딸이 친정 부모님을 모시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니 신사임당이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시댁도 친정도 신사임당의 재능을 인정해서 다른 일보다도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특별히 더 많이 배려를 해주었을 것이다.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도 아내의 예술 작품만큼은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비록 주막집 여인을 사랑하여 그녀를 후처로 맞아들였지만 말이다. 신사임당은 사망하기 전에 아이들을 생각해서 재혼은 하지 말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저승에서 이원수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오죽헌 뒷마당에 울창한 까만 대나무숲에선 바람 따라 흔들리는 댓잎 소리가 사라락사라락 마치 책장을 넘기는 듯했다. '이곳에선 나무들도 글을 읽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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