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밤공기에 가득 담긴 솔향기에 이끌려 아내를 비롯한 친구들과 남한산성 밤산책에 나섰다. 북문 쪽 산책길을 따라 오르는데 오래됐지만, 너무도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나도 몰래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눈으로 말해요, 살짝이 말해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 사랑은 눈으로… 에이, 젠장, 그럼 난 맨날 남이겠네."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느라 저만치 앞서가는 아내를 대신해서 내 팔짱을 끼고 함께 걷던 선배 누나도 흥얼흥얼 따라 부르던 노래를 멈췄다.

"왜?"

너무도 감정 섞인 내 말투에 선배는 물론 나도 놀랐다. 나는 서둘러 웃으며 말했다.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만 말하고 눈으로만 사랑하자잖아.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치사하게."
 
시력을 잃은 지 15년이 다 돼가니까 이제 없어질 만도 한데, 불쑥불쑥 농담이라고 내뱉은 말에 나도 몰래 속마음이 담겨 나올 때가 있다. 분명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내 머릿속에서는 제대로 이성이 작동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숨겨진 감정이랄까,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억울함이랄까, 하여튼 나도 그런 내 모습에 놀랄 때가 적지 않다.
 
놀란 선배 누나를 달래려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와 내 얘기를 듣고 있었는지 아내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얼마 전에 자기가 꿨다는 그 꿈도 그런 거 아녜요?"
"꿈? 무슨 꿈?"
"아, 별건 아닌데, 그래, 그것도 이상했지. 그게 말이야, 며칠 전 꾼 꿈인데…."


나는 또다시 장황한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는데...
 
오색 빛깔 화려한 등산복을 차려입은 친구들이 내게 손을 흔들고 앞장서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도 지팡이를 고쳐 잡고 그 뒤를 따른다.

"오랜만이네."

친구가 다가와 묻는다. 나는 주위의 멋진 풍경을 둘러보느라 그 친구에겐 눈길도 주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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