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9년 지인의 소개로 일본 회사에 취업하면서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2년 뒤 직장 생활을 일단락하고 일본의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당시 일본에는 <겨울연가>로 시작된 한류붐이 이어지고 있었다. 운 좋게 한 신문사의 문화센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학생들은 주로 50대에서 70대까지의 여성들이었는데, 마치 소녀처럼 배움의 기쁨을 느끼시는 모습에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국문과 출신도 전공자도 아닌 내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에 부담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내 나름 한국어의 매력을 전달하고자 수업 준비에 공을 들였다. 

그나마 한국에 있을 때 언론사 취업을 준비했던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한국어 능력 시험을 두어 번 응시했었는데, 그때 사용했던 책과 자료를 참고해 가며 수업을 준비했다.  

일본 생활을 지속할수록 모국어의 소중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한자와 히라가나, 가타가나로 뒤덮인 길거리에서 한국어 간판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사막에서 오아시스 발견!'에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국어 노래라도 들려올 때면 괜히 눈물이 흐를 것 같이 벅찬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도 일본은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관광지나 공공시설 등에는 일본어, 영어, 중국어와 함께 한국어가 표시되어 있을 때가 많았는데 대부분 사전을 뒤져 적당히 번역한 조악한 한국어일 때가 많았다. 어떤 간판은 '이것이 말로만 듣던 혐한인가?' 싶을 정도로 한국어 화자(話者)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도 있었다. 
 
이거 혐한인가... 내가 직접 번역에 뛰어들다

대학원 시절 지금의 남편과 만나 결혼하며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고 재택근무가 가능한 번역일을 시작했다. 내가 계약한 회사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으로 조건도 좋았고 일감도 많은 편이었다. 

백화점, 공항, 관공서, 호텔 등 다양한 고객들로부터 의뢰가 들어왔다. 대학교 홈페이지를 통째로 번역한 적도 있었고, 기업의 사내 신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일본 곳곳에 한국 출신의 유학생, 근로자, 주부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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