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벌교는 집에서 10리 안팎 거리로써 할머니가 걸어서 시장 보러 가셨다. 할아버지는 여동생을 벌교 소화다리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곤 하셨다. 초등학교 방학 때 나주에 사는 부모님을 만나러 구룡역에서 기차를 타면 첫 정거장이 벌교다. 외서 외갓집을 갈 때 벌교를 지나서 같다.

이처럼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벌교라는 이름은 벌판의 '벌'과 개펄의 '개'를 따서 벌개라고 했다. 여자만의 바닷물은 벌교 천을 타고 벌교읍까지 오르락내리락했다. 읍 양쪽을 오가는 나무를 엮어 만든 뗏목다리가 읍 이름이 되었다. 벌교는 지형과 사람들 기질로 인하여 전국적인 상징이 많다.

지형적으로 앞바다 쪽으로는 너른 여자만이 있고, 대표적인 해산물이 벌교 꼬막이다. 가족이 순천에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살짝 데쳐 놓은 꼬막 한 소쿠리를 다 먹는다. '한턱낸다'라는 말도 꼬막 껍데기가 턱 밑에 쌓이도록 낸다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뒤로는 보성, 순천과 화순으로 이어지는 너른 벌판이 있어 농산물이 풍족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벌교에서 주먹(힘) 자랑하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경제적으로는 농수산물이 풍부한 벌교 장이 열리는 날 인근 힘깨나 쓰는 사람이 모여서 힘을 겨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19세기 말까지 낙안군수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다. 임경업 장군이 30대 초반에 낙안군수로 있었고, 훈련받은 장정들의 기질이 내려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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