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광주 금남로에서 맨주먹의 시민을 향해 계엄군이 총을 난사했다. 우리 군대가, 우리 국민에게 총을 쏜 것이다. 수많은 시민이 죽고 다쳤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거리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광주시민이 무장에 나섰던 이유다. 시민들은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시민군이 결성됐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이 시가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5시 30분경,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을 몰아냈다. 시민의 힘으로 계엄군을 물리친 것이다.
 
계엄군의 만행과 광주의 참상은 전라남도 곳곳으로 전해졌다.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들은 지역에선 계엄군의 만행과 신군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일부 지역주민은 광주로 달려갔다. 
 
광주의 참상은 옆동네인 전라남도 무안에도 바로 전달됐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후, 광주를 빠져나온 차량시위대가 무안읍에 도착하면서다. 시위대는 나주와 함평을 거쳐 무안으로 왔다.
 
차량시위대는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다'며 군민 궐기를 호소했다. 계엄군에 구타당하고, 광주를 겨우 빠져나온 지역주민의 증언도 잇따랐다. 군민들이 동요했다. 광주에 살고 있는 자녀와 친인척이 걱정됐다.
 
광주의 참상을 들은 군민들이 버스터미널 앞으로 모여들었다. 40∼50대 중장년은 물론 고등학생도 많았다. 금세 500여 명이 터미널 광장을 가득 메웠다.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읍내 전역으로 퍼졌다. 
 
광주고속 버스를 타고 무안읍내에 들어온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목포로 향했다. 일부는 망운면과 운남면을 거쳐 해제면으로 갔다. 해제지서(파출소)의 무기고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해제지서를 지키는 경찰은 없었다. 시위대는 수월하게 총기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총기의 노리쇠가 이미 제거된 상태였다.
 
5월 22일, 읍내에 머물던 시위대는 무안지서(파출소) 무기고를 찾아갔다. 무안지서는 지금의 무안군청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서를 지키는 경찰이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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