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사람이나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不殺人 不殺物). 둘째, 충과 효를 함께하여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 왜와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 우리 도를 밝힌다(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군대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신과 귀족을 모두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
 
동학이 내세운 4대 강령이다. 봉건과 외세 반대를 내세우며 떨쳐 일어난 동학혁명이 올해 130주년을 맞았다. 지난해엔 동학혁명 관련 주요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백성이 주인 되어 외친 자유와 평등, 인권이 세계에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동학혁명은 1894년 2월 시작됐다. 조직화된 백성이 반봉건 민주, 반외세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운동이었다. 백성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첫 사례다. 동학군 주력부대는 그해 4월 영광·함평을 거쳐 장성으로 들어왔다. 동학군은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과 황룡강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동학군은 대포와 서양식 총으로 무장한 관군에 맞서 싸웠다. 관군으로부터 대포 2문, 양총 100여 정을 빼앗고 지휘관 이학승도 죽였다. 동학군의 큰 승리였다. 왕이 보낸 군대를 동학군이 무찌른 것이다. 동학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진 것은 당연했다.
  
 
싸움에선 새롭게 등장한 무기 '장태'가 위력을 떨쳤다. 장태는 대나무를 쪼개 둥근 모양의 닭집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그 안에 볏짚을 넣어 굴리며 방패로 활용했다. 방탄 무기를 확보한 동학군은 관군과의 싸움에서 무서울 게 없었다. 관군의 기관총과 소총 탄환은 장태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장태는 높이 1.5미터, 폭 4.5미터 가량 됐다. 장태 뒤엔 동학군 10여 명이 몸을 의지하며 관군의 공격을 피했다. 일상에서 쓰인 닭집을 방탄용 무기로 바꾼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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