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가 아니다"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명나라 학자 이탁오의 말인데, 현자들의 말은 젊은 시절에는 흘려듣다가 나이 들어 무릎을 치는 때가 있다. 그는 양명학자로서 신분차별에 반대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등 유교적 질서를 거스르는 혁신사상을 펴다가 체포되자 자결했다.

지난해 고교 졸업 50주년 기념 문집에서 내 원고가 빠진 데다 그 편집위원장이 몇 년 전 송년회에서 내 아내에게 혐오 발언을 한 사실까지 알게 되자 이런 부담스러운 동창생을 친구라 할 수 있느냐는 회의감에 빠졌다. (관련 기사: 남의 아내 귀에 대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니).

'머리가 커지면서 생각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자신의 가치관이나 설익은 이념으로 친구를 매도한다면 절연해야 한다'는 분노와 '그래도 50년 친구이고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데 화해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체념 사이에서 갈등했다.

교우관계를 맺고 끊는 법
 
최근 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취재하다가 교우관계를 어떻게 맺고 끊는지에 관한 배움을 얻었다. 그는 바로 '유럽 간첩단 사건' 피의자였다가 국내 최고 도금 전문가로 성공한 김판수 익천문화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55년 전 딱 이맘때인 1969년 5월 1일 새벽 5시, "판수야" 하고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 대문을 열었다가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체포돼 남산으로 끌려갔다. 고춧가루를 타서 물고문하는 등 갖은 고문을 당했지만 동베를린에 두 번 갔다 온 것 말고는 불 게 없었다. 동서 베를린 통행도 그런대로 자유로운 때였다.

그러나 이 수사 결과는 1967년 '동백림 사건'과 함께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크게 포장해 발표됐다. 한자로는 다르지만 겨울부터 봄까지 제주 산천을 붉게 물들이는 동백(冬柏) 꽃을 연상시키는 '동백림'(東伯林)은 공안당국이 빨갱이 딱지를 붙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는 '1967년 6.8 부정 총선 규탄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5년형 받은 김판수

서울대 영문과에 다니던 김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동향 선배 박노수의 초청으로,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때 동베를린에 갔다. 통일을 향한 열망과 북한에 관한 호기심으로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게 문제돼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김 이사장은 지난 4월 26일 전화 인터뷰에서 굳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2013년 제출한 재심청구의견서로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와서 본 사건 피고인들의 완전한 결백을 주장하거나 미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순수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희들이 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은 엄연히 실정법 위반이었지요. 그러나 과연 그만한 과오로 한창 피어나는 젊고 유능한 학자를 사형시켜야 했을까요. 그냥 뒀으면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했을 엘리트의 목숨과 바꾸어서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유럽 간첩단 사건'은 2013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사형이 집행된 박노수 교수와 김규남 국회의원에게 뒤늦은 무죄선고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청년 김판수의 인생 행로도 완전히 뒤집혔다. 그는 감옥에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 책으로 도금을 연구해 출옥 후 호진플라텍의 모체가 되는 호진실업을 설립했다.

도금 기술로 번 돈 문화계 지원

호진플라텍은 반도체 리드프레임, 인쇄회로기판, 커넥터 등 전자부품 도금 분야에서 선두 기업이 됐다. 익천문화재단 공동이사장인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홈페이지 인사말에서 그가 그렇게 번 돈을 어떻게 써왔는지 소개한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