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노동자의 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2021년 8월 29일.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에서 '특성화고노동조합' 경기지부장으로 선출된 윤설은 힘주어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현장에는 최서현 위원장과 이은하 초대위원장 등 스무명 정도만 참석했지만 "고마워요, 수고해요"라는 격려가 넘쳐났다.

90년생 윤설은 울산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록밴드 활동으로 보냈다. 밴드연합회 회장을 맡아 '파이프'를 엮어 직접 무대를 설치하면서 록페스티벌을 개최했다. 자우림과 레이지본을 좋아했고 현대중공업노동조합이나 여성민우회 행사에도 초대받아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행복하고 즐거운 10대였다.
 
수원에서 대학을 마친 윤설은 학원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보낸 10대 시절에 비춰 괜히 미안했다. 봉사라도 하자는 마음에 이런저런 청소년 지원단체를 쫒아다녔다.

2016년 그때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를 하던 열아홉 살 김군이 숨졌다. 이듬해인 2017년엔 서귀포산업고의 이민호군이 생수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다가 기계에 끼여 숨졌다. 특성화고 아이들이 당한 이 사건이 윤설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는 2017년 시민단체인 '특성화고 권리연합회'에 들어가 아이들의 멘토 노릇을 시작했다. 

특성화고 아이들을 인정하기까지
 
활동 초기 그는 아이들과 부딪혔다. 진로상담을 한다면서 윤설이 늘어놓은 얘기가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은 가야 하지 않겠니?" 같은 말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고졸 학력이 멍에가 됨을 알면서도 특성화고를 선택한 아이들은 '대학' 얘기를 싫어했다.

"어떻게든 대학은 마쳐야 한다"고 부모가 특성화고 진학을 반대한 경우도 있고 형편이 어려우니 네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고 떠밀린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열다섯, 중학교 3학년 나이에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특성화고에 대한 화려한 학교 홍보와 달리 대기업과 공공기관 취업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현장실습처는 최저임금에 걸쳐있는 사업장이 대부분이었고, 현장에 나가면 어른들의 반말과 욕지기를 들어야 했다. "공부 못해서 특성화고 들어갔냐, 지금이라도 맘 잡고 공부해라"라는 모욕도 당해야 했다.

아이들은 때때로 "대학보다 큰 인생공부를 하고 있다"고 윤설에게 말했다. 이 아이들을 만나면서 윤설은 생각을 바꿨다. 아이들의 특성화고 결정을 존중하고, 이 선택이 상처받지 않게, 특성화고를 나와도 차별받지 않고 안전한 일터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그래서 윤설은 특성화고권리연합회 회원으로서 아이들을 옆에서 돕는 것을 넘어 당사자 조직에 직접 참여하기로 한다. 

마침 특성화고노동조합도 2020년부터 졸업생은 물론 고등학교 재학생까지 조직대상을 확대해 노동조합의 취지에 동의하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문호를 열었다. 윤설은 기꺼이 가입했고, 아예 경기지부장까지 맡게 된 것이다.
 
윤설이 지부장이 되고 가장 크게 맞닥뜨린 일은 홍정운 군의 죽음이었다. 당시 고3이었던 홍 군은 2021년 10월 여수에서 현장실습 중 물에 빠져 죽었다.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따라고 지시를 받고 이를 작업하다 그만 변을 당한 것이다. 물을 무서워하고 잠수자격증도 없는 아이였다.

윤설은 책임자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고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또 서명운동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문제로 가벼운 충돌도 있었다. 수원 삼일공고 앞에서 '재발 방지 대책 마련 8대 요구'와 '최저임금미달 현장 실습처 제보' 서명운동을 시작했을 때 몇몇 교사들이 다가왔다.

교사 중 한 명이 "학생들의 학적이 학교에 있으니 학생들에 대한 '소유권'을 우리가 갖고 있다. 허락 없이 서명받지 말라"며 행사를 가로막았다. 아침도 거르고 아이들 등교 시간에 맞춰 종종거리며 왔건만 이날 서명 작업은 중단되었다.

윤설과 경기지부 조합원들은 며칠 후 "학생들에 대한 소유권은 교사가 갖고 학생들은 자기 결정권이 없다니요?"라는 펼침막을 들고 항의 방문을 했다. 그는 삼일공고 교장을 만난 자리에서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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